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
노인을 위한 공간은 있다. 수원 조원동 평화의모후원이다.
입소 자격은 기초생활수급자거나 형편이 어려운 노인이다. 현재 70세에서 100세까지의 노인 60여명이 머물고 있다.
이곳에 행복이 있다. 힘겨웠던 삶을 마무리하는 노인들과 그들을 돕는 9명의 수녀들, 22명의 직원들은 서로에게서 피어나오는 행복을 나누고 있다.
# 학도의용대로 한국전쟁 참전한 평화전도사
"우리 사는 것 자체가 기적 같다. 이곳이 천국 아닐까."
김항식 안드레아(87)옹은 3년여 전 아내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수원 조원동의 평화의모후원에 거처를 마련했다. 40대 중반에 15살 어린 아내를 성당에서 만나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았다.
오랜 투병 끝에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반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견디기 어려웠다.
가슴이 아픈 만큼 몸도 아팠다. 진찰을 받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의사가 '평화의모후원의 문을 두드려보라'고 안내했다.
'학도병 출신' 선교사 김항식 옹
특별한 입소일 공동체 생활 즐겨
연평도에서 태어난 김옹은 물 건너 황해도 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중학생 때 혈혈단신으로 서울의 한 신학교에서 신부(神父)수업을 받다 학도의용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학교로 잠시 돌아갔지만 결핵이 도져 결국 신부의 길을 포기하고 일평생을 '평신도 선교사'로 살다 마음만 먹으면 기도할 수 있는 평화의모후원에 왔다. 입소 일자는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인 2015년 6월 25일이다.
김옹은 "평생을 불쌍한 노인들을 위해 희생하는 수도자들이 우리 양로원의 수녀님들"이라며 "언젠가 숨을 거두게 될 때가 오면 평화의모후원에서 후회 없이 보내어지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의 손 대신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떼야 하는 그이지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유의 미소를 건네며 공동체 생활을 즐기고 있다.
김옹이 몸을 뉘는 침대 곁에는 창문이 있다. 아침마다 햇살이 그를 깨우고 그가 사랑하는 평화의모후원이 감싸 안은 정원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의 행복은 '평화의모후원'이다.
# 이제는 사라진, 갈 수 없는 그곳, 평양에서 온 100세 청년
"순안비행장 자리가 내래 고향이라우."
한재일 요셉(100)옹은 평양 순안에서 왔다. 팔순을 앞둔 아들은 여전히 평양에 있다. 아쉬운 이별이다. 4살 아래 아내 소복순(96) 할머니와 함께 월남해 의정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1919년 4월 5일 태어난 그의 '백수연'(白壽宴)을 수녀님들이 준비해줬다. 정성스럽게 만든 백수 기념 앨범을 소싯적 사진 옆에 두고 방문객들에게 자랑하며 내보인다. 한옹 곁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이 수여한 백년해로부부 표창장도 놓여있다.
평화의모후원에는 2002년 12월 27일에 아내와 함께 들어왔다. 지난해 12월 아내의 병세가 나빠지기 전까진 2인실에서 함께 지냈다. 소 할머니는 6차례나 대수술을 받아 기력이 많이 쇠했다.
한재일 옹 '백년해로부부 표창'
"아내와 서로 의지" 백수연 가져
한옹은 2층 환자방으로 자리를 옮긴 아내를 하루에도 수차례씩 만나러 간다.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은 걸음이 가볍다.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날아가듯 걷는다. 간헐적 이산가족이다.
소 할머니는 한 세기를 꽉 채워 살아낸 남편을 의지한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이 소 할머니의 활력으로 옮겨진다.
소 할머니는 "몸이 많이 아프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힘이 난다"며 "있는 그대로를 천천히 받아들이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한옹은 "부인이 아파서 속상하고 안타깝다"면서도 "100살까지 살지 꿈에도 몰랐지만,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삼시세끼 따뜻한 밥에 간식까지 먹으며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이날 간식은 감자떡에 사과였다.
# 평화의모후원을 지키는 사람들
"어르신들의 행복이 제 행복이지요."
잠시 평화의모후원을 지키는 청년이 있다. '미소천사' 사회복무요원 김재훈(21)씨다.
수원 송죽동에 사는 김씨는 수원하이텍고등학교 전기전자과를 졸업하고 한국가스공사에 취업했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잠시 휴직한 그는 2018년 3월 소집돼 평화의모후원에 배치됐다.
김씨는 "무거운 짐을 옮겨드리고 식사시간에 음식을 날라드리고 설거지하는 것이 주업무"라며 "노인분들의 생활에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평화의모후원 구성원 모두를 섬기는 수녀님이 있다. 이상옥 헬레나 원장수녀다.
원장, 수녀·직원과 함께 보살펴
"행복, 자꾸 나를 내려놓는 연습"
세상 사람들은 '왜 이런 것인지, 왜 아픈 것인지, 왜 힘든 것인지' 묻는 '왜'의 연속 속에 살아간다.
헬레나 원장수녀는 모든 것을 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어르신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 "행복은 자꾸 나를 내려놓는 연습이예요. 아마, 그래야만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에요. 마음 한켠에 행복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길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될 거예요."
원장수녀 곁에서 올해로 98세를 맞은 안경례(98) 할머니는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내내 건강하세유"라는 덕담을 건넸다. 안 할머니의 고향은 충청북도 충주다.
# 평화의모후원은
가난한 어르신들을 임종 때까지 모시는 평화의모후원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Little Sisters of the Poor)가 운영한다.
이 수녀회는 1971년 한국에 진출해 현재 평화의모후원(수원), 성요셉 동산(전주), 쟌주강의 집(서울), 예수마음의집(담양) 등 4곳에 양로원을 건립했다.
평화의모후원은 청주에 있다가 1989년 10월 수원 조원동의 현 위치로 옮겨졌다.
수녀회 설립자는 쟌 쥬강(1792~1879) 성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쟌 쥬강 성녀는 47세가 되던 1839년 앞을 못 보는 할머니를 모셔와 자기 침대를 내어주고 다락방에서 생활했다.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의 시작이었다.
쟌 쥬강 성녀의 선행은 170여년이 지난 현재 세계 31개국으로 전파됐고, 200여개 양로원에서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