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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계양산 소나무 시위에 나섰던 신정은 국장이 12년 전 오른 소나무 눌직이를 15일 찾아가 두 팔로 껴안았다. 신 국장은 소나무 3그루에 기대 시위를 벌였다. 신 국장에 이어 소나무에 오른 윤인중 목사는 그 이름을 우직이, 묵직이, 눌직이로 지어 불렀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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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신격호 명예회장은 그룹을 총괄하던 1974년 계양산 전체 면적의 3분의2에 해당하는 275만㎡(약 78만평)를 매입했다.

계양산 북사면 일대를 골프장이 포함된 위락단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가로막혔다. 인천의 진산(鎭山)이면서 시민들의 쉼터인 계양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롯데건설은 2006년 6월 인천시에 테마파크 조성과 친환경 구상을 덧입힌 '새 계획'을 제출했다. 개발 논리가 확산됐다.

계양산 골프장 개발을 주저하던 인천시의 입장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8월 인천의 4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계양산 골프장 저지 인천시민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발족해 총력 대응에 나섰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어 보였다.

"개발 행정은 빠르게 움직이는 반면 그에 대응하는 이슈를 만드는 일에 한계"를 느꼈다. "평화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계양산의 가치를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어느 날 대책위 한승우 사무처장이 미국의 환경 운동가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Julia Butterfly Hill)의 '삼나무 시위'를 얘기했다.

1997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당시 스물 두 살의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은 '수백 년이 된 삼나무를 베지 말자'며 삼나무 55m 높이에 오두막을 짓고 목재 회사와 738일을 싸웠다.

인터뷰 공감 계양산 골프장 반대 농성
신정은 국장은 2006년 10월 26일 밤 계양산 소나무에 올라가 그 이튿날인 27일 오전 6시부터 시위를 시작했다. 사진은 시위 첫 날 모습이다. /경인일보DB

그렇게 계양산에서는 2006년 10월 26일 자정 무렵 인천녹색연합 신정은(40) 녹색참여국장이 목상동 솔밭의 소나무 위에 올라가 56일을 지냈다.

계양산 골프장 반대 시위는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이슈가 됐다. 차기 지방선거 후보들은 '계양산 골프장 반대 공약'을 내걸어 선거를 치렀고, 당선 이후 계양산 골프장 계획을 폐지했다.

이런 행정절차가 부당하다며 롯데 측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근 대법원 판결로 패소해 계양산 골프장 건설은 백지화됐다. 계양산 소나무 시위 12년 만의 일이었다. 12년 전 계양산의 소나무에 오른 신정은 국장을 만났다.


-계양산 골프장 반대 투쟁에서 시민단체가 긴 싸움을 거쳐 대기업을 이겼습니다.


"우선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쳐 이뤄낸 일이에요.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요. 저는 초기에 불씨를 붙이는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제가 소나무에서 내려온 뒤 바통을 이어 소나무 시위를 약 150일간 하신 윤인중 목사님도 기억해야 합니다. 계양산 골프장 반대 운동에 동참하면서 그 안에서 같이 성장하고 커 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천녹색연합 박주희 사무처장은 2008년 인턴으로 들어와 실무를 보며 기자회견, 삼보일배, 시민조직, 서명운동 등을 현장에서 지켜봤어요. 이한구 시의원은 계양산 주민으로서 골프장에 반대했고 '시민의 후보'로 시의회에 입성해 골프장을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오카리나 연주가 정미영 선생님은 골프장 반대 촛불문화재 때 매번 나오셨고, 이제는 '거리의 어려운 이들'이 있는 현장에서 연주하고 계세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싸움에 동참하신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계양산이 크게 여러 사람을 품어온 것 같다고."


-12년 전 소나무 시위, 무섭지 않으셨나요.


"2006년 10월 26일 자정 무렵 녹색연합 암벽팀 녹색친구들, 인천녹색연합 활동가 등 10여 명이 다남동에서 20~30분간 고개를 넘어 목상동 솔밭으로 넘어갔어요.

암벽팀 선배님들이 소나무 3그루에 올라가 못질 하나 안 하고 노끈으로 대나무를 엮어 1.5평 공간을 만들어 주셨어요. 소나무 시위 이틀째 되는 날 '관리인'이라는 분이 나무에 낫을 들고 올라와 집기를 밖으로 던지는 소동이 있었는데, 그때 관리인 측에서 나무에 오르기 위해 박은 못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나무 위에 한참 있다 보면 소나무 향기가 몸에 배어요. 이러다가 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인간이 해에 큰 영향을 받는 것도 느낄 수 있었어요.

한밤에 비가 쏟아져도 아침에 해가 뜨면 물기가 마르고, 바람이 그렇게 불어도 해가 뜨면 잦아들어요. 바람이 불 때 산골짜기에서 바람이 후후후 밀려오는 소리가 들려요. 초반에는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바람과 같이 흔들리니까 무섭지 않더라고요."

신정은 국장은 녹색연합 암벽팀 회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등산 실력이 수준급이고, 암벽 등반 기술도 익혔다.


-환경 운동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대 초반에 우연한 기회에 녹색연합이 발행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접해 읽기 시작했어요. 삶의 방식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시작됐어요.

그 책을 인천에서 안 팔아 서울 영풍문고까지 가서 사다 봤어요. 그것을 쉽게 받아보려고 (서울)녹색연합 회원이 됐어요.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시작한 것도 변화의 계기가 됐어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천에 애정이 크게 없었는데 그게 잘 몰라서였던 것 같아요.

그냥 별 고민 없이 '그 시기에 해야 할 것 하면서 사는 인생'이었거든요. 사부님(이종복 대표)이 '그딴 식으로 공부하면서 세상을 산다고?'라고 말씀하셔도 싫거나 그러지 않고 잘 받아들였어요. 산이 좋다고 열심히 다녔는데 제가 기억하는 계양산은 힘든 산이었어요.

남사면 쪽은 계단이 많고 경사가 가팔라 썩 좋은 숲이 아니라고 봤어요. 녹색연합 하고 와보니 너무 좋은 거예요. '이렇게 좋은 곳이 인천에 있는데 바깥의 좋은 데만 찾아 다녔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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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환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회사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인천에 있는 건설 설비 회사에서 일하면서 인천공항 옥외 배관 그림을 그렸어요. 당시에는 맨날 영종도 공항 건설 현장으로 출근했어요. 또 용인에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원전 설계에 참여한 적도 있고요."

-환경운동가가 개발 분야에서 일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직장 생활이 힘들었어요. 보수도 너무 낮았고 파견직, 계약직으로 일해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몸소 겪었어요. 녹색연합 회원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제가 하는 일의 괴리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계약 끝나고 외국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인천녹색연합 자원봉사를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활동가 1분이 그만두게 됐고, 사무처 상근을 제안받으면서 활동가를 시작했어요."

신정은 국장은 상근 활동가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 "활동가?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제 일이 아닌 것 같아요"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인천녹색연합 회원 교육을 담당하는 중견 활동가로 성장했다.

환경 관점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게 그의 임무다. 신 국장은 "제가 바르게 잘 사는 것을 옆에 사는 사람이 보고 귀감이 될 때, 그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신정은 국장은?

1978년 인천 송현동에서 태어나 축현초, 인천여중, 인화여고를 졸업한 인천 토박이다.

부천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설비 설계 분야의 민간 기업에서 일했다.

2006년 1월 인천녹색연합 녹색교육팀 간사가 되면서 환경운동에 본격 나섰다.

같은 단체에서 생태보전팀 간사, 조직지원팀 간사 등을 거쳐 현재 녹색참여국 국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