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년 전 일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미국 텍사스로 향하는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멀리 인천에서 온 손님들을 따뜻하게 집으로 맞이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기대는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는 일어서려는 손님들을 붙잡았다. 저녁 식사로 바비큐를 손수 대접했다.
격의 없는 대화가 3시간이나 더 오갔다. 그가 두꺼운 파일 2개를 건넸다.
진지하게 팀을 고민한 흔적들이 녹아 있었다. "그게 '변화'의 첫 시작이었죠." 류준열 인천 SK 와이번스 대표이사는 2년 전 트레이 힐만 감독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포스트시즌 개막 전 힐만은 고향에 있는 노부모를 돌보기 위해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 승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류 대표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힐만 감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한국시리즈) 우승의 열망이 강한 것 같다"고 했었다.
힐만 감독은 SK를 2년 연속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그 원동력은 '소통'의 리더십이었다. 더그아웃에 크고 작은 변화가 일었다. '소통'을 중시하는 미국 스타일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생겨났다.
힐만 감독은 격의 없이 선수들을 대했다.
농담도 자주 건네고 짓궂게 장난도 쳤다. SK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 선수들이 이런 변화에 잘 녹아들었다.
힐만 감독은 지난 16일 출국을 앞두고 열린 15일 감독 이·취임식 간담회, 경인일보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우승 소감과 2년 간의 소회를 피력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면서 "내가 다가서면 (SK 감독을 맡기 전에 경험한 미국·일본 선수들 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SK가 공을 들여 키워오던 장타력을 갖춘 선수들도 '믿음'을 기초로 한 힐만의 야구 철학에 힘입어 급성장한다. SK의 차세대 거포 한동민이 대표적이다. 포스트시즌 들어 극심한 부진을 겪은 그는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힐만 감독은 그를 믿었다.
결국, 한동민은 플레이오프에 이어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도 승부의 쐐기를 박는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힐만의 기대에 부응했다.
두 경기는 모두 한국 야구사에 남을 명승부였다.
힐만 감독이 꽃피운 '홈런 군단' SK는 통산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이른바 '제2의 왕조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리고 힐만 감독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군 KBO 리그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으로 인천 시민은 물론 한국의 모든 야구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모든 순간이 행복했고 뜻깊은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면서 특히 "지난 3주 동안의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힐만 감독은 선수들을 각별히 대했다. 결코, 무리하게 선수를 기용하는 법이 없다.
당장 눈앞의 승부에 집착해 선수를 혹사하지 않았다.
힐만 감독은 시즌 초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하고 2년 만에 복귀한 에이스 김광현과 관련한 네 가지 관리 매뉴얼을 제시한 바 있다.
▲선발 등판 후 24~48시간 내 팔꿈치 상태와 피로 등 체크 ▲투구 수와 이닝 수 관리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직구 구속과 평균구속의 차이 확인 ▲얼마나 힘겨운 이닝을 소화하고 내려왔느냐 등이다.
이를 통해 김광현의 성공적인 복귀와 포스트시즌 호투를 이끌어 냈다.
힐만 감독은 "김광현이 올 시즌 복귀해 잘 해줬다. 득점 지원이 부족하거나 특정 이닝에 투구 수가 많아지면 결과가 안 좋았던 적도 있지만, 부상으로 한 해를 거른 것을 고려한다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시즌을 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힐만 감독의 야구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빛이 났다. 그는 소아암으로 투병 중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머리카락을 일부러 길렀다.
힐만 감독을 따라 김광현도 시즌 초 성공적인 복귀전을 치른 뒤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라 기부했다.
SK 선수들의 헌혈 행렬도 이어졌다.
힐만 감독은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에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소아암을 앓고 있는 김진욱(11) 군의 학교를 직접 찾아가는 깜짝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건강한 모습으로 플레이오프 6차전에서 시구를 했던 김군은 이·취임식에서 떠나는 힐만 감독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건넸다.
힐만 감독은 팬서비스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승리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팬들에게 SK는 야구를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수도권에 있는 타 팀 팬과 심지어 축구팬들도 야구장에 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프로야구 선수들은 팬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맞다"면서 "하지만 내성적인 선수들도 있고, 가족과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선수들도 있다. 팬들도 배려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힐만 감독에게 물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SK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지체 없이 '변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힐만 감독은 "이번 우승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했다"며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염경엽 신임 감독에 대해서도 "소통에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 선수들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힐만 감독은 홈 팬들에게도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언제나 보여주었던 열정적인 응원과 지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글/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 미국 텍사스주 애머릴로(1963년 출생)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1985년 입단)
▲ NPB 니혼햄 파이터스 감독 (2003~2007년 10월)
▲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 (2007년 10월 ~ 2010년 5월)
▲ LA 다저스 코치 (2010년 11월 ~ 2013년 10월)
▲ 뉴욕 양키스 어시스턴스 코치(2014년)
▲ 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 코치 (2015~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