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엡윗청년회' 인천 내리교회서 최초 결성
을사늑약 항의시위 해산…1916년 재조직
이후 국악연구단체 '이우구락부' 멤버로

인천광역시는 2015년 '한국 최초, 인천 최고 100선'(인천역사문화총서 74)을 간행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는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한국 최초이자 인천 최고(最古)의 사실들이 담겼다. 간행 이후 시는 해당 건물이나 장소에서 자체 개발한 상징 아이콘 현판식을 진행했다.
지난해 6월 시는 인천 중구의 내리교회에서 현판식을 개최했다.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를 세상에 다시 한 번 알린 자리였다.
더불어 '엡윗(Epworth)청년회'에 대한 현판식도 함께 열렸다. 엡윗청년회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창설한 감리교회 청년단체이다.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의 출생지가 엡윗이었다.
국내에서 엡윗청년회는 1897년 중앙 조직을 갖췄다. 이후 지역 교회로 전파되는데, 가장 먼저 엡윗청년회가 생긴 곳이 인천 내리교회였다.
![[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5]근대도시가 열리다⑥ 근대 문물 유입 (下)](https://wimg.kyeongin.com/news/legacy/file/201812/2018122001001440100069194.jpg)
내리교회 엡윗청년회는 인천 청년운동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게 빌미가 돼 엡윗청년회는 1906년 해산한다. 1916년 재조직 후 이전 회원에 신규 회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활동했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29일자에 '인천엡윗음악강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인천남자엡윗청년회 음악부가 주최한 내리예배당 강연회를 예고하고 있다.
기사 상에는 회원과 함께 일반 시민의 참여도 독려하고 있다.
1920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문예지 '개척(開拓)'을 펴내기도 했던 인천 엡윗청년회의 활동은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와도 맥이 닿아있다.
이우구락부는 우리 음악 연구와 공연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 시키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 기사와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우구락부는 일제가 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악을 통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모색하면서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 등을 열거나 참여했다.
이를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의 <기전문화연구 4집>에 수록된 노영택의 논문 '일제하 인천의 청소년운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이우구락부의 간부는 하상훈, 서병훈, 최선향, 이범진 등이었다.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인 하상훈은 내리교회 앱윗청년회 회장이었다. 기타 간부들 역시 내리교회의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논문에선 이우구락부를 내리교회 계열의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로 정의한다.
또한,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 안에 본거지를 두었다. 동아일보 초대 인천지국장이 하상훈, 부지국장이 서병훈이었으며, 총무는 최선향, 경제부 기자는 이범진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이 이우구락부에 참여했다.
<인천시사>에 이우구락부에 대해 기록한 대목이 있다.
"이 단체의 창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처음에 인천부 내리에 임시 본부가 있다가 후에는 용강정에 회관이 있었다. 이 단체 역시 전체적인 임원 명단은 알 수 없으나 1923년 4월 27일 제7회 정기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부장 하상훈, 총무 서병훈, 학습과장 고주연, 도서과장 박충의, 운동과장 라시극, 식산과장 전두영, 평의원 윤육 외 9인 등이다. 1924년 직제를 간부제로 변경하여 임원을 개선한 뒤에도 역시 하상훈이 간사장이 되고 서무 서병훈, 학습 최선경, 도서 이범진이었다."

<인천석금>에서 저자 고일 선생은 자신의 견해를 더해서 이우구락부를 소개하고 있다.
"인천의 음악 운동을 살펴보면, 초기 고전 국악 연구 단체로 동아일보 인천지부 건물에 있던 이우구락부가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죽림칠현 격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것은 고상한 음악 동지가 필요한 데서 나온 성싶다. 구락부 명칭은 '이문회우(以文會友)'라는 말에서 따온 것 같다. 주요한 부원으로는 최선경, 송균, 서병훈 씨와 동아일보 사원들이었다. 이들 7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식을 하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청년회' 회장 하상훈 등 사회 다방면 활동
동아일보 사원 다수, 음악동지로 정기모임
국악·양악 어우러진 공연 후원 대성황도
<인천시사>에서 보듯이 이우구락부의 창단과 해산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우구락부 관련 기사는 1920년부터 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서 검색된다.
기사에선 이우구락부가 당시 인천에서 개최한 각종 음악회와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다. 음악회 기사에 표출된 출연자 항목에 이우구락부로 표기된 것을 봤을 때 회원 각자가 연주 활동을 한 전문 음악인들로 보이진 않는다.

이 글에서 소개된 이우구락부에 가담한 인물들을 소개한 후대 기록에서 악기를 잘 다뤘다고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예술인이라기 보다는 주로 언론인 혹은 사회활동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공연을 적극 주최하고 후원한 부분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에 '인천의 음악대회' 기사가 있다.
인천부 가무기좌에서 열린 음악회는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졌으며, 대성황을 이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음악회는 한용단과 이우구락부가 후원했다고 표기돼 있다.
지역 문화계 원로 중 한 명인 김윤식 시인은 "개항 이후 새로운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신문물이 도입되는 와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