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내서 보릿고개 없이 유복한 유년시절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명문 평양고보 졸업
고향근처 국민학교 교편 잡은것 행복했지만
100년처럼 느껴진 일제강점기 36년의 '악몽'
2019년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외침이 있었다. 꼭 100년 전 일제의 총칼 앞에서 굴하지 않은 선조들이 목놓아 부르짖은 '대한독립' 만세다.
그 울림은 대한민국의 지난 100년을 지탱해 온 원동력이었다. 경인일보는 지난 한 세기를 오롯이 살아낸 한 사람의 미시사(微視史)를 통해 갈등과 반목으로 가득 찬 혼돈의 100년을 넘어 화합의 새 시대를 준비한다.
1919년생 김용민 할아버지. 그는 수원에서 제3의 인생을 살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분단된 남북의 지식인 다수를 배출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전쟁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고향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양장점을 운영하다 30년 전 은퇴해 성남·이천에 거주하다 수원에 정착했다.
# 평양 엘리트를 억누른 일제강점기 36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약골이라고 생각했는데, 100살이 다 되도록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
김 할아버지는 평양의 중심 남문리 80번지 포목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대부터 평양 시내에서 알아주는 포목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보릿고개도 경험하지 않고 유복하게 자랐다.
평양 상수소학교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었던 그는 평양고보에 진학했다. 졸업 후 평양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평안남도 여포국민학교에서 1941년부터 4년간 교사로 일했다.
조선인 김용민에게 일제강점기는 36년이 아니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었다.
"일제 36년 36년 하는데, 내가 겪은 일제시대는 지독히도 길었어. 너무 길어서 100년처럼 느껴졌어. 다른 조선인들도 다 마찬가지였을 거야."
목욕탕 이용도 차별을 당했다. 교사 김용민이 근무한 여포국민학교에는 2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1명은 교장이고 1명은 평교사였는데, 둘 사이는 그닥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교장 관사에 있는 목욕탕에서 씻을 수 있는 교사는 일본인 평교사 1명 뿐이었다.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조선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를 감사했다.
"한 면에 국민학교가 딱 하나 있었는데, 내가 고향 가까운 곳의 조선인 아이들 앞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이었지. 옆 반 담임교사가 음악 수업을 하기 싫어해서 음악 수업을 맡아서 풍금을 치며 동요를 가르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해."
그의 기억 속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 의병장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평양일보라는 매체에 홍범도 장군이 전투 중 숨졌다는 기사가 나와 평양 사람들이 숨죽여 슬퍼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전사한 줄 알았던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는 것을 80세가 다 돼 알게 됐다. 김 할아버지는 수년간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다 광복을 맞지 못하고 숨졌다는 것을 알고 또 울었다.
"일제가 항일 활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흩어놓으려고 중앙아시아로 이주를 시킨 거야. 홍범도 장군도 죽은 것이 아니라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서 숨죽이고 목숨을 부지하셨던 거지. 일제가 다 그렇게 끌어다 이주를 시키니까 조선인들은 항상 억눌려 있었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 일왕 항복에 종지부
평양 군중대회서 직접 본 김일성 '30대 젊은이'
해방 기쁨도 잠시… 동족 상잔 비극 '한국전쟁'
큰 형님과 중공군 피해 남쪽으로 걷고 또 걸어
# '찰나의 기쁨' 해방과 지옥 같았던 한국전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본의 압제가 종지부를 찍고 해방이 찾아왔다. 일왕의 항복 선언은 김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을 직접 본 일화도 소개했다. 김 할아버지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 기림리공설운동장(현 김일성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군중대회에 참석했다.
10만여명의 '인민'이 모인 운동장에서 그는 조만식 선생과 테렌티 포미치 스티코프 소비에트연방 육군 중장(소련군정 조선 최고지도자), 김일성 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해방된 뒤 평양 사람들 인사가 '김일성 장군님 오셨나'였어. 그만큼 신망이 두터웠던 거야."
인민들은 만주에서 항일운동하던 백발이 성성한 장군님을 고대했다. 스티코프 장군은 '조선에서 난 위대한 장군님'이라고 김일성을 소개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김일성은 30대 젊은이였다.
"신출귀몰한 반일 항쟁을 했다는 김일성 장군님을 뵙고 싶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어. 머리카락을 '꼬딱' 세우고 곤색 양복을 맞춰 입은 젊은이가 나와서 분위기가 술렁술렁했지. 학생들은 가짜 김일성이라고 삐라를 만들어 뿌리기도 했어."
평양 중산층은 소련군이 주둔하고 공산주의 지도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북녘의 주요 요직은 결국 함경도 사람들이 다 차지했다.
평양 시내의 이름난 포목점 막내아들이었던 김 할아버지에게도 동족 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괴로움'이었다. 교사였던 김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피란했다.
1950년 12월부터 시작된 1·4 후퇴 당시 김 할아버지는 큰 형님과 함께 중공군을 피해 남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황해북도 서북단 황주군에서 철수 도중 도태된 영국군과 만난 기억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24살의 젊은 군인은 70여㎞ 떨어진 후퇴 집결지 신막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행군 도중 전열에서 이탈해 홀로 남아 있었다.
"고보에서 영국식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발음을 알아듣기가 어렵지 않았어. 지금은 '마더'라고 하잖아. 그런데 영국 애들은 '모도'라고 발음해. 둘이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같이 걸었지."
평양에서 서울까지 중공군을 피해 논밭은 물론 깊은 산 계곡을 가로질러 일주일을 걸었다.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혀 앞서 가는 6살짜리 아이의 걸음을 좇지 못할 정도였다.
서울서 만난 동창생 집에서 남녘의 새 삶 시작
양장점 운영하며 대한민국 관통한 사건들 목도
"무슨 일이든 좋게 해결하는 방법 분명 있었어
다투지 말고, 오래들 살았으면 해" 화합 당부
# 그들의 서울, 우리의 서울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마스 이브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시청 앞 사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어떤 선택지도 없이 큰 형님과 폐허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하늘과 땅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은인을 만났다. 평양고보 동창생이었다. 동창생은 부산행 열차표를 끊고 가족들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텅 빈 광화문네거리 돈화문 앞 2층 동창생 집에 김 할아버지는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낯선 서울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서대문네거리 피난민 증명소에서 김 할아버지는 3살을 더 먹게 된다. 사연인즉슨 피난민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연령 오기로 1919년생이 된 것.
"서울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기 위해선 피난민증명서가 있어야 했어. 길게 늘어선 인파 속에서 분명히 29살이라고 말했는데, 32살로 오기가 됐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때 이 증서가 근거가 돼 1919년 2월 2일생이 된 거야."
김 할아버지는 해방 전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징용을 피했고, 전쟁이 끝난 뒤엔 호적상 나이가 30대 중반이 돼 국군 징집도 피했다.
전쟁 직후 총각 김용민은 청진에서 난리를 피해 내려온 처녀 최옥선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우리 마누라가 재단을 정말 잘했어. 영등포구 신길동에 신길양장점을 차려서 30년 넘게 운영을 했지. 여의도 국회에서 일하는 단골들도 많았지."
반세기를 지내오면서 김 할아버지는 투표가 가능한 대통령 선거는 꼬박꼬박 투표소를 찾아 한 표를 행사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유신 헌법,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어 세월호 참사까지 반세기 대한민국을 관통한 사건들은 김 할아버지 집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 들었다.
"가족의 단란한 삶 말곤 더 바란 게 없었어. 통행금지 시간엔 안 돌아다녔고, 국가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했지. 대학을 못 가 봤는데, 기회가 됐다면 영문학과에 들어갔을 거야. 무슨 일이든 좋게 해결하는 방법이 분명 있었어. 다투지들 말고 오래들 살았으면 해."
김 할아버지는 얼굴에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겪었다. 하지만 김 할아버지는 중견 기업 이사로 퇴직한 큰아들과 멋들어진 헤어숍을 운영하는 작은아들, 한 남자의 아내로 옹골찬 가정을 이루고 사는 딸을 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버지로 지난 100년을 살아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