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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교향악단 연주중인 임원식 지휘자.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자주적인 민족주의 음악 '화두' 역동적 시기
남한 단독정부 수립후 분리공간서 남북 갈려

의주 출신 임원식 하얼빈·동경음악학교 거쳐
1946년 첫 고려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 활동
美 줄리아드음대 유학후 KBS 교향악단 창단
1984년부터 인천시향 7년간 이끌며 기량 높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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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음악학자들은 우리 음악사에서 해방공간(1945~1948)은 직후의 분리공간(1948~1950)이나 직전의 식민공간 보다 역동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치하에선 일본과 서양의 음악언어를 익혀 지배권력을 형성한 식민주의자가 민족 공동체 구성원에게 식민지 언어로 의사소통하게 했다. 반면 해방공간에선 민족적 양심선언이라는 윤리성을 제기해야 했다.

체제분단이 굳어져 가는 냉전체계를 극복하고, 우리 음악에 대한 자주적 인식이 대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크게 훼손된 우리 음악언어를 자주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해방공간 우리 음악계의 과제였다.

이처럼 당시 민족음악론은 윤리·정치적인 면과 함께 미(美)적인 측면에서도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논의된 민족음악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각각 친미와 친소로 나눠 각자 사상에 부합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하는 길에 놓였다. 때문에, 분리공간은 훼손된 민족 정신과 정서의 정화 작업을 요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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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서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한 행보를 편 민족음악론자들은 월북·잠적하거나 체포·구금(처형)당하게 되고, 민족주의 음악언어는 금기어가 된다. 대신 새로운 정부에 편승한 음악인과 단체가 전면에 나선다.

그 시기에 인천 음악계의 움직임은 자세히 살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 열린 음악회들이 신문 등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1945년 10월 이재민 돕기 음악회가 개최되고, 이듬해엔 영화학교 개교기념 음악대회가 열렸다.

또한 각종 현상음악회(콩쿠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가 열리고, 서울관현악단과 이화여대 합창단의 인천공연도 개최됐다. 1949년 최영섭 작곡발표회와 1950년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태인 인천교향악단의 연주회 등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1세대 음악학자 중 한 명인 노동은(1946~2016)은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장편 논문 <해방과 분리 공간의 음악사 연구>에서 "1948년 8월 15일 서울시가 주최한 정부수립 경축 공연에 '서울교향악단'의 출연은 남한 체제의 건재함과 '고려'에 대한 '서울'의 승리, 창작가 보다 연주가의 우위성 등을 안겨다 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의 승리는 1948년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었던 베토벤 '합창교향곡'(서울대 예대 합창단) 연주를 거쳐 1950년 2월 24일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단체로 선정한 데서도 전면에 부각됐다"라고 분석했다.

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계정식과 김생려, 현제명을 중심으로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이었다. 창단 초기 지휘는 주로 계정식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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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교향악단 제2대 상임지휘자 임원식.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1946년 초 임원식(1919~2002)이 고려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는 당대 유일한 전문 지휘자였다. 임원식은 부임한 그해 6월 정기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사임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고려교향악단의 재정난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정기연주회를 끝으로 악단은 해체하고, 단원들은 서울관현악단원들과 함께 서울교향악단으로 흡수된다.

앞서 인용한 논문에서 노동은은 해방공간의 우리 음악상황(고려교향악단)이 분리공간(서울교향악단)으로 바뀐 것을 서울의 교향악단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일 인천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 임원식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하얼빈 제일음악학원을 졸업했다.

1942년 피아노 전공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 당시 유학 중이던 김원복, 전봉초, 윤기선 등과 교류했다. 이후 고려교향악단을 이끌다가 사임 후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지휘자 과정을 수료하고 1948년 돌아온다.  

 

한국전쟁 후 임원식은 1956년 KBS 교향악단을 창단해 초대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며, 1969년 국립교향악단이 된 후에도 1971년까지 상임지휘자 직책을 유지했다.

1961년에는 국내 최초의 예술 전문 고등교육 기관인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도 역임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윤이상이 서울에 압송돼 재판을 받자,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고 재판정에서도 증인으로 출석해 무고함을 호소했다.

베를린 교향악단 연주회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받았을 때에도 윤이상의 '무악' 을 연주했다. 그로 인해 국내 보수 음악인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난 이후 이렇다 할 자리가 없었던 것도 보수 음악인들의 방해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로 인해 1984년 지역 단체인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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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홍콩서 개최된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을 소개한 전단지.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제2대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에 오른 임원식은 1990년까지 7년 동안 재임하면서 악단의 기량과 음악성 향상에 이바지했다. 1992년에는 악단으로부터 명예 상임지휘자 직책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들을 관람했으며,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현재 지역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임원식 선생이 인천시립교향악단에 오시기 전까지 시민으로서 문화와 체육 분야에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았다"면서 "시립교향악단의 경우 전국에서 최하위 수준이었는데, 선생이 오신 이후 '서양 음악을 받아들인 인천'의 수준을 보여줬던 것 같다. 또한 1989년엔 프로야구 태평양 돌핀스가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승리, 플레이오프에선 해태에 패배)하면서 시민들에게 힘을 주는 요인들이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