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서 서울로 통학하며 음악 배워
6·25 혼란속에도 시민·軍 위문펼쳐
정전후엔 교향악단 지휘·교육 활동
1961년 '그리운 금강산' 전국민 사랑
지난해엔 90세 기념 공연·헌정식도
"강화에 돌아가 사랑 보답하며 살것"
지난해 마지막 달의 지역 음악계는 1929년 11월 28일 강화도에서 태어난 작곡가 최영섭 선생의 90세 생일을 기념한 연주회와 이벤트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예술가곡보존회와 K클래식 운영위원회 주최로 12월 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기념 음악회를 시작으로, 12일 인천 엘림아트센터에선 인천문화재단과 (사)아침을 여는 사람들이 콘서트 '작곡가 최영섭,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를 개최했다.
두 음악회 모두 대표작인 '그리운 금강산'을 비롯해 최영섭 선생의 작품들로 꾸며졌다. 70여년에 걸쳐 구축된 선생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것이다.
새얼문화재단은 20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개최한 '제35회 새얼 가곡과 아리아의 밤'의 메인을 '그리운 금강산'으로 장식했으며, '그리운 금강산' 연주 전에 "작품을 통해 고향 인천을 빛내고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한 선생에 대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과 박남춘 인천시장은 각각 준비한 공로패를 증정했다.
연주회 후엔 리셉션장으로 자리를 옮겨 최영섭 선생을 기리는 '장미 헌정식'을 개최했다.
지역 인사들은 선생의 90세 축하와 건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장미 한 송이씩을 전달했다. 또한, 작품을 정리하고 출판 작업을 진행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선생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지용택 이사장은 공로가 있는 선배와 원로를 기리고 모시는 것이 인천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장미 헌정식'을 기획·추진한 바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훈훈한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
기자가 최영섭 선생을 처음 뵌 건 2007년 8월이었다. '인천인물 100人'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원으로서 선생을 인터뷰했다. 기사는 그해 8월 29일자 9면에 게재됐으며, 후일에 책으로도 출판됐다(도서출판 다인아트 刊).
이후 2009년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한 '인천문화예술 구술채록' 사업의 면담자로 최영섭 선생과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선생의 80년 인생을 상세히 들어본 귀한 기회였다. 지난 연말에 열린 연주회에서도 선생을 뵙고 근황을 여쭐 수 있었다.
직접 한 인터뷰들을 기초해서 선생의 음악인생 위주로 기술한다.
최영섭은 강화군 화도면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오르간을 칠 수 있었던 가정 환경으로 인해 찬송가를 화음으로 연주하는 실력이 제법이었다.
길상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온 선생은 창영초교와 인천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가로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독자였던 그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재능을 알면서도 사회 통념상 반대했다. 어머니(신수례·1908~2003, 1998년 정부로부터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 만이 "돈과 명예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며 최영섭을 응원했다.
어머니의 후원을 등에 업고 1945년 서울 경복중으로 전학해 인천에서 통학하며 이화여대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 이론을 배운 최영섭은 1947년 작곡한 첫 작품인 '그리운 옛 봄'을 비롯한 가곡 10곡과 피아노 환상곡 '해변', 피아노 모음곡 '절름발이 인형의 슬픔' 등으로 고교 졸업 직전인 1949년 인천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 땅의 모든 게 멈춰 선다. 전쟁이 나고 4일 후인 6월 29일부터 최영섭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인천 주안의 농장 복판에 반공호를 파고 생활했다.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3개월 가까이 야음을 틈타 전달되는 식량을 먹으며 땅속에 숨어서 지냈다.
서울 수복 후 고향을 등졌던 지역 예술가들도 하나 둘 돌아왔다.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 계열의 구국학생합창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지휘와도 연을 맺은 최영섭은 합창단과 함께 애관극장과 동인천역 인근의 인형극장 등에서 시민을 위한 위문 공연을 수차례 펼쳤다.
또한, 육군의 후원으로 창단한 인천정훈관현악단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합창단과 함께 6개월 동안 부산으로 피란한 최영섭은 연주회와 작곡 활동을 병행했다. 당시 탄생한 작품이 가곡 '망향'이다. 자작시에 곡을 붙였다.
최영섭이 인천으로 돌아온 시기에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창단하고, 다시 지휘를 맡았다. 인천여중·고, 인천여상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내리교회 성가대와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의 지휘도 했다.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한국전쟁 11주년 기념으로 KBS의 청탁을 받아 최영섭과 시인 한상억(1915~1992)이 공동 작업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중 한 곡이다.
강화 출신 두 예술가가 만든 이 칸타타는 '동해의 여명'과 '정선 아리랑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비롯해 산·강·바다를 각각의 주제로 한 3곡, 이렇게 모두 11곡으로 구성됐다. 이 중 '그리운 금강산'은 산에 해당하는 노래 중 한 곡으로 산뜻한 가락과 애끊는 호소력으로 맵시있게 짜여졌다.
최영섭은 당시 숭의동 집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그리운 금강산'을 완성했다. 곡을 쓰기 전 최영섭은 삼촌에게 일전에 가본 금강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삼촌의 이야기에 담긴 심상이 음악으로 잘 표출됐으며, 한상억 시인의 시구와도 어우러지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965년 서울로 이사한 최영섭은 방송음악인이자 편곡지휘자, 또한 대학 강단에도 서며 바쁜 활동을 이어갔으며, 돈과 명예도 얻는다.
50년 넘게 서울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최영섭은 인천에서 진정한 '나'를 만들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특히 한상억·조병화 시인과 만남은 자신의 작품에 자연의 심상이 깊숙이 자리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최영섭은 700여 곡의 가곡과 칸타타를 작곡했고, 2017년 재수정을 거친 악보 7권을 완간해냈다. 교향곡, 실내악곡, 모음곡 등의 기악곡도 70여곡에 이른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