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륙작전 직후 최영섭 선생
구국대 학생합창단서 지휘 '첫발'
정훈관현악단·애협교향악단 등
시향 모체가 된 단체로 보폭 넓혀

전 편('작곡가 최영섭')에서 밝혔듯이 최영섭 선생은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방공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서 포탄 맞은 인천 시내를 돌아봤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휘봉을 잡게 된다. (1월 11일자 9면 보도) 당시 선생은 상륙작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 사회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창영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들을 찾았다고 한다.
신흥동 쪽을 지나는데, 인근의 장로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구국대 학생합창단이라는 완장을 두른 학생 40~50명이 찬송가를 4부 합창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휘하던 젊은 사람이 최영섭 선생에게 다가와 누군데 유심히 지켜보는지 물었고, 선생은 작곡을 전공한 사람이며 화음이 잘 맞지 않는 합창소리가 들려서 들어와 봤다고 소개했다.
자신보다 지휘에 대한 이해가 클 것으로 여긴 젊은 지휘자는 간곡히 최영섭 선생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선생은 고사를 거듭하다가 수락하게 된다. 최영섭 선생과 합창단은 2개월 정도를 매일같이 연습했으며 이를 통해 제대로 된 합창단으로 변모한다.
이후 전쟁으로 인해 몸과 마음 모두 어려워진 사람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치게 된다.
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최영섭 선생은 오케스트라 지휘까지 보폭을 넓혀서 활동을 벌인다.
결과적으로 지역 오케스트라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은 활동들이었다.
전쟁 후 선생이 지휘한 육군정훈관현악단과 인천애호가협회교향악단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와도 같은 단체다.

지역인재 토대 조례 승인 한달새
1966년 시민관서 창단 연주회
1·3대 상임지휘자 지낸 김중석
"거쳐 간 모두가 시향의 역사"
이에 앞서 인천관현악단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이 1945년 창단 이후 2년 후인 1947년 12월 13일 인천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인천영화극장과 애관극장 등에서 연주회를 이어갔다. 인천관현악단은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1953년 6월 21일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이 설립됐으며, 이 악단은 1956년 창립하는 '인천음악애호가협회'의 산하 교향악단으로 재발족했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인천애협교향악단의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협교향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최영섭 선생은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때 인천에선 홍훈표, 김형석, 강춘기, 김중석, 손관수, 정흥일, 김광식이 7인 위원회를 구성해 인천 필하모닉 관현악단을 창단하면서 애협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로 편성됐다.
인천 필하모닉은 10여회의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단원들은 1966년 창단하는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1970년대편 인천시사'에 따르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창단 조례는 1966년 5월 4일 승인됐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제물포고에서 음악교사로 있던 당시 26세의 김중석이었고 40여명의 단원들로 구성됐다.
창단 연주회는 그해 6월 1일 오후 7시30분 인천시민관에서 개최됐다. 창단 연주회가 열린 날은 제정된 지 2회째를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국내 4번째 시립교향악단이 창단하는 순간이었다.
조례 승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창단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지역에 오케스트라 활동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창단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첫 곡으로 '인천 시민행진곡'에 이어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등으로 구성됐다.
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창단 신고도 했다.

인천시민관(인천공회당 자리에 1957년 재건축)에서 창단 연주회를 연 인천시립교향악단은 시민관의 시설이 노후화되면서 1974년 주안에 문을 여는 '인천시민회관'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994년 현재의 인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기 까지 시민회관은 시립교향악단의 활동 근거지였다.
시민회관은 전문 공연장이 아닌 다목적 공간이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음향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1천300여석의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인천시립교향악단의 1대와 3대 상임지휘자를 지낸 김중석은 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이었던 지난 2016년에 소장하고 있던 1965~1983년까지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 관련 소책자와 사진 등 앨범 2개 분량의 자료를 시립교향악단에 전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성과 연주력 측면에서 국내 정상급 단체로 올라선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지나간 것들을 챙겨야 할 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