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이주 조선인 19세기말 2만명 넘어
일제의 강제합병후 국권회복 지사들 몰려
1911~1937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융성
홍범도·이범윤·안중근 등 무력투쟁 전개
거부 최재형, 사재 쏟아 독립운동 지원에
이상설 "조국 독립 못봤으니 제사도 말라"
한민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 말 착취와 기근 때문이다.
러시아 공식 문서에 한민족 관련 내용이 나오는 건 1864년이다.
이해 9월 남우수리스크 포시에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가 상급 지휘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이 이주해 포시에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1869년에는 조선 북부 지방에 홍수로 인한 '기사흉년'이 발생해 함경도 농민 5천500여 명이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후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연해주 지역 한인 숫자는 2만6천여 명이 넘어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을 하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우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 항일 운동의 요람 연해주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지사를 길러내던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마친 뒤 연해주에서 권업회와 동지회를 결성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애국혼을 불살랐다.
이동휘와 이동녕은 북간도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국권 회복을 꾀하다가 연해주로 옮겨 이상설 등과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는 연해주와 만주를 넘나들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러시아 이민 초기 연해주에 정착해 사업을 벌인 최재형은 모은 돈과 구축한 네트워크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간도관리사를 지내다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우던 이범윤은 러일전쟁 직후 연해주로 옮겨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안중근도 그와 함께 전투를 펼치다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세워 거사에 성공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연해주 한인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당원들은 1918년 5월 13일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 동안 한인대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 대표자회의'가 개최됐다.
같은해 12월에는 제2차 대표자회의를 우수리스크에서 개최해 위원장 문창범, 부위원장 김립을 중심으로 전로 한족 중앙총회(고려국민회)를 조직했다.
우수리스크에 본부를 둔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연해주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했고 기관지로 '청구신보'를 간행했다.
전로 한족 중앙총회는 러시아 한인의 최고자치기관이자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이후 전로 한족 총회는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며 노령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 신한촌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한인 거주지다.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구역인 개척리가 폐쇄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11년에 건설됐다. 일제 강점 초기국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권업회의 본부를 비롯해 한민학교, 권업신문사 등이 신한촌에서 활동했다.
신한촌 건설 직후인 1911년 9월경 일제 정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들어선 가옥은 모두 204개 동이었지만 그 뒤 한인이 계속 집중되어 신한촌 인구는 1만 명 규모로 커졌다.
1920년 신한촌 입구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식과 함께 삼일 독립문을 세웠었다. 하지만 신한촌은 1937년 한인 강제이주로 인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현재는 신한촌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있어 그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
그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이자 시작 역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한인들이 한참 이 지역을 개척해 나가던 1907년부터 1912년에 건설됐다.
연해주를 개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역을 통해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안중근 의사도 1909년 하얼빈을 가기 위해 이곳에서 출발했다.
1937년 강제 이주 당시에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한 열차 화물칸에 우리 민족이 실려 쫓겨 났다.
# 잊지 말아야 할 인물 최재형과 이상설
최재형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최도헌으로 불리며 거부였던 그는 사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면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의병의 최고 지도자가 됐고,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다.
하지만 1920년 연해주를 침공한 일본군에 붙잡혀 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총살당했다. 우수리스크에는 최재형 선생이 일본에게 끌려가기 전 거주했던 생가가 남아 있다.
당시 가옥의 원형은 대체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철제 안내판을 도로 쪽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1917년 3월 2일 이곳 연해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에게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자신을 이곳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해 강물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자신의 육체와 함께 자신이 연구하고 쓰고 입고 있던 모든 자료와 물품들을 함께 태워달라는 부탁을 해 현재까지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다.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