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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클릭아트

50여년동안 354차례 정기연주회 연 인천시향
초창기 낭만주의 전반기 작품 주로 무대올려
최근 20세기곡 초연… 지휘자·규모따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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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는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 기념일이었던 2016년 6월 1일에 맞춰 시향이 가장 많이 연주한 작품을 조사한 바 있다.

 

인천시향 50년의 행보를 짚어보려는 게 기사의 의도였다. 초청 연주회와 송·신년 음악회 등 특별 연주회는 배제했으며, 50년 동안 354차례 열린 정기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 

 

1회 이상 정기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은 82개였으며, 그중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12회로 가장 많았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이 11회였으며,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브람스 '교향곡 4번', 드로브자크 '교향곡 8번'과 '9번, 신세계'가 10회로 뒤를 이었다.
 

인천시립교향악단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2016년 5월 1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354회 정기연주회 모습.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창단 초기 규모가 크지 않았던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등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

2대 상임지휘자인 임원식(1919~2002)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처음으로 연주하면서 레퍼토리 확대를 꾀했다. 4대 지휘자인 금노상(66)이 부임하면서 4관 편성으로 거듭난 인천시향의 레퍼토리는 더욱 넓어졌다. 

 

후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말러와 R. 슈트라우스를 선보였으며, 20세기 작곡가들인 버르토크와 쇼스타코비치, 오르프의 작품 등을 인천시향이 초연했다.

인천시향 50주년 기념 연주회로 열린 제354회 정기 연주회에선 정치용 당시 예술감독이 R.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를 인천시향 초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 부임한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은 올해 교향악 축제에 인천시향과 말러 '교향곡 5번'으로 참여하는 등 그동안 자주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시민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인천시향이 100주년을 맞았을 때, 50주년 이후부터 50년간의 메인 프로그램을 조사한다면 이 결과와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인천시향의 역사에는 향유자를 포함한 지역 음악계와 시향의 당시 상황, 여건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군대와 교회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도래한 서양음악은 이 같은 요소와 과정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서양음악은 곧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이전 시기까지 우리 땅에서 음악으로 지칭된 요소들은 '국악' 혹은 '전통음악'으로 불리며 뒤로 물러섰다.

정치, 경제와 마찬가지로 문화(음악) 분야에서도 '서양의 것을 학습해 선진화하려는 시대 정신'이 가미되면서 서양음악이 빠르게 음악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00년 클래식역사, 국내 100년만에 급히 진행
윤이상 세대에 이르러서야 주체적 인식 도모
뮌헨올림픽 기념작 '심청' 등 유럽에도 큰 획

바흐가 작곡한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이후로 잡더라도 300여년 동안 형성된 서양음악사가 우리 땅에선 100여년 동안 축약되어 나타난다. 이 기간에 조성적 화음으로만 이뤄진 기초적인 노래부터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음악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서양음악의 유입 창구 기능을 한 인천에서 최영섭(90)을 제외하고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해서 활동한 작곡가를 찾기 힘든 대목은 아쉽다. 

 

윤이상(1917~1998)과 금수현(1919~1992), 이상근(1922~2000) 등이 이내 떠오르는 부산과 비교해도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전반(윤이상)으로 범위를 넓혀 언급을 잇는다.

서양음악 도입 세대의 우리 작곡가들은 주로 노래를 만들었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수용에 집중했을 이들에게 '한국적 음악'이 고려될 여지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위 '작가 정신'을 가진 작곡가의 작품이기보다는 새 문화의 접촉 이후 공감하고 즐겼던 음악인들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가사에 대한 정서로 인해 한국적 애환이 묻어난다는 평가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주 붙은 서양 노래의 틀에 민요적 가락과 장단을 도입한 정도였다. 

 

즉, 도래한 서양음악에 대한 반성이나 한국의 고유 음악양식에 대한 추구 등이 없이 만들어진 노래들이라 할 수 있다.

작곡가 윤이상
20세기 서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이후 세대에 등장하는 작곡가 윤이상 등은 우리 음악계에 주체(반성)적 인식을 도모했다.

윤이상은 1956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가기 전 국내에서 가곡과 기악곡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50년부터 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로 재직 때(휴전 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김) 동요 70여곡을 작곡했다. 

 

당시 초등학교 1~6학년 음악책에 수록된 동요 100여곡 중 윤이상의 작품이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동요 다음으로 많은 윤이상의 곡은 교가이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전 고향인 통영의 문화협회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통영공립여자중학교 등에 재직한 윤이상은 4년 동안 시인 유치환·김상옥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는 9개에 이르며 학교마다 특색을 살려서 만들어졌다.

윤이상이 한국 생활기(작곡 전반부)에 발표한 가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 음악 유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함께 활동했던 안기영, 김성태, 채동선, 김순남, 이건우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양과 우리 음악 사이에서 균형적 질서를 유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윤이상의 유럽 생활기(작곡 후반부)에도 이 기조는 이어진다. 1985년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윤이상이 직접 밝혔듯이, 그는 197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 전통을 서양음악의 언어로 개조하는 데 천착했다. 

 

동아시아적이라는 표현에는 한국과 중국의 궁중 음악뿐만 아니라 신화적인 소재들과 도교, 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형 예술의 모티브들이 포함된다.

윤이상의 대표작 중 하나인 관현악곡 '예악'은 이 같은 사상적 기반에 당대 펜데레츠키와 리게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의 기법이 묻어난다. 

 

이후 동베를린사건을 비롯한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윤이상은 이 경험들을 보다 명백한 음악 언어로 구사하기 위한 시도도 한다.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 축하작이었던 오페라 '심청'을 비롯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와 '화염에 휩싸인 천사' 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인천문화재단 CI
'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윤이상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