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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3·1운동 및 독립운동과 연관된 사람들. 왼쪽부터 조봉암, 이동휘, 고유섭, 유봉진, 이길용, 심혁성, 박세림, 유경근, 유두희와 인천상고 27회 학생들인 정태윤, 김형설, 송재필, 김려수, 고윤희, 기재연. 배경은 인천대교와 3·1 독립선언서. /경인일보DB·인천고등학교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가장 日스러운 도시 만들려던 일제… 인천 3·1운동 평가 '미미'
독립운동가 유배지인 영종·무의도 '함성' 용동 '아이들의 만세'
인천고 항일단체 고초사·전국 13도 대표자회의 연 만국공원등
지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관련 인물·사건들 흔적 찾아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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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이 시작되자마자 다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이라면서 야단이었다.

 

3·1절이 가까워지면서는 더욱 그렇다. 인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3·1운동, 더 나아가 독립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100년이나 되었건만 기초적인 연구성과조차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인천에서는 3·1 만세운동의 불길이 유난히 약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일제가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인천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려는 이유이다.

영종도나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은 인천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 섬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지만 3·1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까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도 묻혀버렸다. 인천 중구 용동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만세운동도 제법 거창했던 모양이다. 그 중심에 우현 고유섭(1905~1944)이 있었다.

그 일단을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가 그의 책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밝히고 있다. 최원식 교수는 '월간공예' 1988년 6월호에 실린 시인 배인철의 큰형 배인복의 인터뷰를 토대로, 용동에서 아이들 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우현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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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아홉 살이던 배인복의 만세운동 얘기다.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한 고유섭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열다섯 고유섭이 동네 꼬마들에게 태극기를 그려주었고, 앞장서서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는 거다.

초가지붕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기도 했다니 보통 열의가 아니었다. 인천문화재단이 2006년에 펴낸 책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보면, 고유섭의 부인 이점옥 여사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 졸업생들은 학창시절 조직한 항일단체를 계속 이어가다가 해방을 얼마 남기지 않고 발각되어 여러 명이 고문을 받아 옥사하는 등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른바 '인상 출신 불령분자들의 비밀결사 사건'이었다.

1941년 졸업생(인상 27회)들이었다. 24명이 붙잡혔다. 조선인 동기생이 47명이었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수가 비밀결사 대원이었던 거였다.

체포된 24명 중 4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고, 11명은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조직한 항일단체 구성원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한 사례가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에 또 있을까 싶다.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는 3·1운동 시작 1개월 뒤인 1919년 4월 2일, 한성임시정부의 시작을 알리는 전국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기도 했다. 그만큼 전국 대표자들이 공공장소에서 회동하기가 어려웠다.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만국공원에서 회합하기로 한 것만으로도 인천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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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여지도서 영종진도. 영종도 예단포와 무의도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영종용유지' 발췌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항일 운동과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애쓴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도 빼놓을 수가 없다. 김란사는 인천 감리서(조선 말기 개항장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 별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하상기의 아내였다.

1872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란사는 1893년 하상기와 결혼하며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결혼했으면서도 미혼 여성만이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던 이화학당에 입학한 여장부이기도 했다.

그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1900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 문과에 입학해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김란사는 이화학당 교사로 여성교육에 힘쓰는 한편 성경학교 설립, 부인 계몽교육, 독립운동 등 사회활동에도 앞장섰다.

이때 유관순을 가르쳤다. 교회에서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위해 영어와 성경도 가르쳤다. 김란사는 조선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도 배워야 하며, 여성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고종의 통역사이기도 했던 김란사는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 한국대표로 비밀 파송 중 중국 베이징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일제 밀정에 의한 독살설도 있지만, 급성 전염병에 걸려 타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김란사와 관련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밖에도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한 인물과 사건들이 인천에 퍼져 있지만 '인천'과 '독립운동'을 하나로 묶은 연구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 올해 그 작업이 폭넓게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중기획의 첫발을 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