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계봉우, 무의·영종 생활 등
기초데이터 부족… 고민해 볼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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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3·1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은 뒤 100년, 그 힘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선 지도 100년이 되었다. 영종도와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다는 점이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이게 바로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기초 데이터조차 모아놓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들이 흩어지고 묻혀버렸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기로 한 것은 '100년'을 말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차원이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악사건(105인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동휘·이승훈·박도병·최종호·정문원·김병옥 등 19인은 무의도·제주도·고금도·울릉도 등으로 1년 유배가 결정되었다'고 사건 결과를 썼다.

인천과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동휘(1873~1935)가 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동휘의 무의도 유배 사실은 무의도 주민들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만 아는 정도인데 어떤 향토지에서는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은거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다. 유배와 은거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독립운동과 유배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계봉우(1880~1959)이다. 국사학자, 국어학자, 민속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으로 활동한 애국지사이다.

그가 영종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계봉우는 1911년 1월 이동휘와 함께 간도로 이주해 교편을 잡았다. 그 뒤 연해주로 옮겨 '권업신문' 기자와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6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구인됐으며,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917년 12월 석방된 뒤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계봉우는 특히 1919년 초 3·1운동을 준비하던 인물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계봉우 역시 예단포에서의 유배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제라도 이동휘와 계봉우의 인천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 다시 살피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계봉우 또한 인천과 관련 있는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