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 원하는 자 모이라' 월곶면 군하리 장날 첫 시작
서울 3·1 만세운동 참여했던 22세 박충서 중심 골방 회동
양촌읍 곳곳에 격문 배포… 오라리장터 군중 수백명 모여
사전 치밀한 계획대로 향교·면 사무소 앞에서 '실력항쟁'
김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드넓은 김포평야이다.
한강 줄기를 따라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야에 곡식이 무르익어 황금 물결을 이뤘다.
마음속의 고향 같은 곳, 김포평야는 황금 물결 넘실대는 곡창지대로 예로부터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풍부한 한강의 수자원을 바탕으로 우리 농경 역사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김포시는 직접적으로 서울과 통하고, 인천과 접하며 우리나라의 젖줄인 한강 하류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유역을 따라 김포1·2동, 양촌읍, 하성면으로 넓게 펼쳐지는 평원이 김포평야이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평야가 많이 사라졌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김포쌀은 이른바 통진미(通津米)로 이름나 있으며, 지금은 '김포금쌀' 브랜드로 유명하다.
김포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처음 시작됐다.
이날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는 박용희와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이었다. 성태영은 군중에게 '조선독립을 원하는 자는 공자묘(향교)로 모이라'고 권유했다.
이에 백일환과 이살눔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군하리 향교 앞에 모였다. 시위 군중들은 통진 공립보통학교, 월곶면사무소, 군하리 경찰관 주재소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재소로 몰려간 백일환과 시위군중은 4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백일환은 10명을 앞세워 주재소에 있던 순사보 이성창을 끌어냈다.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떠나 다시 면사무소로 돌아와 면서기 조원석 등 3명에게 태극기를 쥐어 주고 만세운동에 동참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군하리 장날의 만세운동이 있었던 바로 다음날 23일에는 양촌면 오라리 장터에서 두 번에 걸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양촌면 오라리 장터 만세운동의 핵심인물은 박충서였다.
박충서는 당시 22세의 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서울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충서는 집으로 돌아와 박승각, 박승만, 안성환, 전태순과 함께 3월 19일 안성환의 집 골방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독립만세운동을 동리에서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비분강개한 내용이 담겨진 격문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모이라'는 취지의 경고문 10여 통을 작성하고 이 뜻에 동참한 오인환, 정억만과 함께 각자의 역할을 정했다.
이들은 사전에 작성한 격문과 경고문을 김포군 양촌읍 내의 각 곳에 배포해 지역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며 민심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적극적인 독립의지에 동참한 주민 수백 명이 드디어 3월 23일 오라리장터에 모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다시 오후 4시경 시장에 300여 명이 모여 또 한 번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은 당시 대곶면 초원지리에 거주하며 서당의 교사로 활동하였던 정인섭과 임철모가 주도했다. 두 사람은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으로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3월 24일에는 고촌면 신곡리에서 김정국, 윤재영, 윤주섭 등의 주도하에 50여 명이 마을 뒷산에 올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리고 다음날 25일 김정의, 김남산, 이흥돌은 미리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2개 제작하여 50여명을 이끌고 동리 이상윤의 짚 앞마당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3월 29일에는 월곶면 통진읍내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월곶면 조강리에 사는 잡화 행상을 하던 최우석이 당인표 집에 전날 28일 모여서 사전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최우석은 앞서 일어난 22일 군하리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사전에 만세운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뜻을 같이한 월곶면 고정리의 조남윤, 조강리의 윤종근, 민창식 등은 28일 밤 주민 수십명과 함께 함반산(含飯山) 꼭대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산상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다음날 29일 윤종근, 조남윤, 최우석 등은 전날 통진 읍내의 시위를 계획한 대로 오전 11시경 주민 400여 명을 규합해 향교 앞과 월곶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김포는 강화도와 바다를 끼고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근대의 격전장이었다. 근대의 격전장에서 다시 피어올랐던 만세의 외침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면서 장터에서 시작해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실력항쟁으로 이어갔다.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