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협회 신임 회장직을 맡았는데
회원사들 한목소리 낼 수 있도록 노력
업계 간 기술교류 없는 문제 개선할것
장기간 주주배당 않고 품질개선에 투자
기본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 결실 맺어
"비결 같은 건 없어요. 돌아보면 그저 못살게 될까봐 두렵고 겁났습니다. '금수저'까지는 아니어도 '은수저'쯤 쥐고 태어났는데, 그래서 주변에 늘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런데 그 부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폐지를 주워야 할 정도로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어요. 그게 두려웠습니다. 살아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했습니다."
인천 사람들이 사랑하는 쌀막걸리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이하 인천탁주)의 정규성(62) 대표의 이야기다.
정규성 대표는 한때 맥주에 밀려 '아무도 찾지 않던 술'로 전락했던 지역 막걸리를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지금의 '소성주'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그는 1996년부터 인천탁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인천탁주는 11명의 주주가 운영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회사로, 인천지역 11개 탁주 양조장이 연합해 1974년 설립됐다.
정규성 대표는 최근 전국의 크고 작은 100여개 막걸리 제조 기업이 모인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게 됐다.
인천의 소성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막걸리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술로 키워내는 역할까지 해야 해 어깨가 무겁다. 지난 10일 청천동에 있는 공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신임 막걸리협회 회장직을 맡아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어떠한 계획을 갖고 있나.
"대형 막걸리 회사인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는데, 크고 작은 막걸리 회원사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에서 말했습니다.
또 업계 간의 기술교류가 거의 없는데, 이 부분도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막걸리 업계가 전문가 그룹이 두텁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업계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IMF 직전인 1996년부터 인천탁주 대표를 맡아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
"대표를 맡은 직후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회사를 파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공장 연매출이 20억원 정도로 큰 슈퍼마켓 매출에 불과할 정도로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에서 인천 막걸리가 아닌 타지역 막걸리가 70%이상 판매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계양구에 농사짓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조차 막걸리가 아닌 맥주를 마시던 상황으로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IMF가 찾아온 이후에는 막걸리가 서민주인 탓에 반짝 매출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2000년도 막걸리의 타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막걸리로 성장시킨 비결을 듣고 싶다.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사실 주류 시장이 특별한 비결이 필요한 시장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거래처를 갖고 태어나는 물건은 술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막걸리만 제대로 만들면 다 받아 줄 텐데, 막걸리 사업을 망하면 아무 사업도 못할 거라고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려고 했던 노력이 지금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1996년 대표를 하면서부터 10년 가까이 주주 배당을 하지 않고 품질 개선에 투자했습니다. 맛없으면 할머니가 해준 떡도 안 먹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편없던 종업원 월급도 다른 공장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했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주들도 많이 희생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막걸리의 지역 경계가 없어지면서 위기를 맞은 이후 어떻게 극복했나.
"지역 판매가 자율화하면서 여러모로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포천의 막걸리가 전국을 주름잡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탁주는 그때부터 그동안 간섭하지 않던 유통 부문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막걸리를 판매하시는 분들이 중구에 기반을 갖고 계신 분들이 부평지역에 납품하고, 부평에 기반이 있는 분들이 중구에 납품하고 서로 경계가 없었는데 이것부터 정리했습니다.
사실 거래처라는 게 별것도 아닌데, 영업비밀이라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분들을 설득하기가 힘들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설득하며 추진했습니다."
#막걸리 세계화 가장 먼저 시도했는데
반짝인기였을뿐 큰 의미 두고 싶지 않아
한국인이 즐기는 술, 그 자체가 더 중요
#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월급 많지 않지만 직원들 행복했으면
사랑받는 만큼 보답… 기부활동 희망
-인천탁주는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한 시도를 가장 먼저하고 결실도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막걸리의 세계화는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탁주는 1992년 막걸리를 장기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테트라팩'에 담은 멸균탁주 '농주(農酒)'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일본 등에 수출하기도 했는데, 막걸리 정식 수출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 LA와 시카고에서 열리는 국제식품쇼에 출품하기도 했고 1994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음료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속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술이 된 줄 알았죠. 하지만 당시 그것은 인천 막걸리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화 추세 속에 인천의 막걸리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는데 마케팅 능력도 없었습니다. 반짝 인기를 끌었을 뿐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남을 의식하지 말고 우리끼리 즐기는 술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베트남이나 일본에도 막걸리와 비슷한 술이 있다고 합니다. 막걸리를 모든 한국사람들이 즐기는 술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거지 막걸리가 세계화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인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소성주가 어떤 술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나.
"막걸리를 서민들의 술이라고 합니다. 소성주도 계속 서민들의 곁을 지켜주는 서민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으며 이어갔으면 합니다.
막걸리 고급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싸게 즐기는 서민들의 술로 오래도록 그들의 삶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라지는 한국문화유산이 많아 슬픕니다.
막걸리가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세계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됐으면 합니다. 소성주를 비롯한 막걸리를 즐겨 찾아주는 국민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 인천탁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어떤 것인가.
"가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직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월급을 많이 주진 못하지만 직원들이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공부 잘하고 뛰어난 능력이 필요한 직원들이 많아야 하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 공장에는 외국인노동자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일자리가 얻기 힘든데 외국인에게까지 일자리를 뺏기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또 민속주를 외국인이 만들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장은 평범한 분들이 일하는 곳이죠. 이 공장 안에서 그 분들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월급 받고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합니다.
또 소원이 있다면 막걸리를 즐겨 마셔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말고. 기부 활동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사랑받는 만큼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정규성 인천탁주 대표는?
▲ 축현초등학교, 상인천중학교, 송도고등학교, 제주대학교 식품공학과
▲ 1989년 대화주조 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 1996년 인천탁주제조 제1공장 대표 취임
▲ 2017년 대한탁약주제조중앙회 회장
▲ 2019년 사단법인 한국막걸리협회 회장
-주요 수상내역
▲ 2013년 대한적십자상(기부분야)
▲ 2014 사랑의 열매 대상(기부분야)
▲ 보건복지부 2015년 제1회 행복나눔상
▲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