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공원
강화읍사무소를 끼고 용흥궁 근처에 있는 용흥공원. 3·1독립운동 기념비를 보고 나면 공원 위쪽의 강화성당이 보이고, 그 아래 용흥궁의 입구가 있다.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 제공

경성 3·1운동 소식 들은 유봉진등 모여 의기투합
'독립선언서·국민회보' 신문 만들며 활동 본격화
기독교 조직 중심… 장날 맞춰 군중 수만명 모여
군수·경찰서장도 기세 눌려 합세 '충돌없이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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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 강화를 넘는 강화대교를 따라가다 보면 강화읍내의 용흥궁을 바로 만난다.

강화도는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 오랜 세월 침강하면서 섬이 됐다. 오늘날 제주, 거제, 진도, 남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성지이기도 하다. 시조 단군이 내려오신 이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 지내며 지금도 하늘의 뜻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강화도는 우리 역사의 무수히 많은 아픔을 안고 있는 곳이다.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의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수난의 역사와 함께한다.

근대 제국주의가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렸을 때 제국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곳이 강화다.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쳤던 병인양요(1866)와 미국의 침략을 물리쳤던 신미양요(1871) 그리고 일본제국의 침략의 발판이 됐던 운요호 사건(1874) 등을 우린 기억한다.

강화-읍내강화3.1독립운동기념비
강화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11월 26일 용흥궁공원 내 건립된 강화'3·1독립운동 기념비'.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 제공

또한 1876년 일본제국은 군함 8척을 강화 갑곶 앞바다에 대놓고 무력시위를 벌여 이른바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켰다.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지만, 조선연안의 측량권을 일본인에게 허용하고, 개항장의 범죄를 속인주의에 입각해 자국의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치외법권 조항 등이 들어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즉 강화도조약은 식민지배를 위한 일본의 속셈을 드러내며 정치·군사적 침략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경인지역 최대 규모 3·1운동은 근대의 격전장 강화에서 벌어졌다.

강화의 3·1운동은 무려 2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만세운동이었다. 강화의 3·1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유봉진과 황도문이었다.

성공회강화성당
1900년 강화도에 설립된 한식 중층건물 '강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 제공

유봉진은 길상면 온수리 출신인데 3·1운동 당시 34세로 구한말 진위대 군인으로 이동휘의 직계부하였으며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3월 8일 온수리 감리교 목사 이진형 집에서 같은 동리사람 황유부, 황도문과 함께 운동을 사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라는 신문을 찍었다.

이것이 강화 3·1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강화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읍내를 비롯하여 각 면과 리 대부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최초의 시위는 3월 13일 부내면 읍내 장날을 이용해 전개됐는데, 일본 군경의 사전 단속으로 크게 확대되지 못하고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만의 만세운동으로 그쳤다.

그러나 5일 후인 18일 장날 2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고 군중들은 시장, 군청, 객사, 향교 등을 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인지역에서 가장 많은 군중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는 이날의 만세운동은 기독교 조직이 중심이 되어 촉발됐다.

강화-길직교회
길상면 길직교회(현 강화초대교회). 당시 길직교회는 강화 3·1운동 발상지였다.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 제공

이날 시위군중이 2만명에 달하자 겁에 질린 일제경찰은 주동자들을 체포했다가 놓아주기도 했으며, 군수나 경찰서장도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독립만세'를 부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강화의 3·1운동은 경찰과의 무력 충돌이 없이 평화적인 '만세'구호 행진으로 진행됐다.

강화읍사무소를 끼고 용흥궁이 있는 용흥공원이 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살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는 보통 민가였는데 철종이 왕위에 오른 뒤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4년(1853)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했고, 고종 때(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수했다.

용흥공원 길에는 '그날의 함성 독립운동길'이 작게나마 조성돼 독립만세이야기를 펼치며 용흥공원의 '3·1독립운동 기념비'와 조우한다.

용흥공원에서 3·1독립운동 기념비를 보고 나면 공원 위쪽의 강화성당이 보이고, 그 아래 용흥궁의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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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리교회 3·1만세운동기념비.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 제공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르프 주교에 의해 최초로 건립됐다.

전통적인 한옥 구조물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예배당에는 또 다른 근대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용흥공원에서 바라보는 강화의 역사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외세의 침략에 격렬하게 대응하였던 격전장으로서, 또 일제가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 올 때에는 의병이 강하게 일어나 저항한 곳으로, 그리고 침략과 극복의 역사 속에 경인지역 최대의 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곳으로 강화는 기억된다.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