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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성명회 선언서 불어본, 주한 독일 영사가 본국으로 보낸 성명회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에 첨부된 서명인 명부. 총 112장의 서명부 8천62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을사늑약 반대 상소·계몽운동하다 러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 조직
1910년 망국직전 '일제 만행 고발·독립의지 천명' 8624명 서명서 美·佛등 외국정부에 전달
'주도 혐의' 일제에 붙잡혀 소무의도에 발묶여… 알려진 내용 없지만 이동휘와 교류 유추
이후 대한국민의회등 활동 '사회주의' 색깔론 묻혀 2006년에 애국장 추서… 행적 연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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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진정한 대한국민은 자신의 자유와 국가의 광복을 획득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다는 소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도 전해졌다.

 

경술국치일 엿새 전인 그해 8월 23일 결성된 해외 독립단체 '성명회(聲明會)'는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26일 한인 지도자를 비롯한 8천624명의 서명을 받아 세계 각국 정부에 발송했다.

성명회 선언서 사건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주동자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성명회 블라디보스토크 회장 오주혁(1876~1934)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나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오주혁은 2006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는 등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았던 터라 그의 행적이나 일대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소무의도로 유배를 갔다는 일본 기록만 있을 뿐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1905년 유생들과 함께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벌이며 일제에 대한 항거를 시작했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상설도 이때 상소 운동을 주도하며 고종에 같은 내용의 상소를 5번이나 올렸다.

오주혁은 애국지사들의 상소를 반박하는 선언서를 낸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개와 말만도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간사한 계교와 여우 같은 아첨으로써 우리 선량한 백성을 몰아다가 남의 보호 지도, 감리하는 밑에 돌아가고자 하느뇨"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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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의 첫 장.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이라는 제목의 문서는 메이지 44년(1911년) 8월 5일자로 기록돼있다.

오주혁은 1906년 함경도 지역 인사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에서 결성한 계몽운동단체 '한북학회'(漢北學會)에 참여했다. 

 

황성신문 1907년 12월 19일자는 같은 단천 출신 이동휘 등과 함께 오주혁이 평의원으로 선출됐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한북학회는 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북학회는 훗날 평안도·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이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편됐다.

오주혁은 이후 이상설 등과 함께 해외로 망명해 교육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소무의도 귀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성명회 선언 사건을 주도했다. 

 

성명회는 망국을 앞두고 연해주 각처로 망명한 유인석·이상설 등이 만든 단체다. 오주혁은 성명회의 핵심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회장이라는 중역을 맡았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한민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 외곽인 초기 한인마을 이름으로 1910년 전후 항일 망명가들의 독립운동기지였다. 이 개척리는 1911년 5월 전염병 유발을 이유로 러시아 당국이 강제 철거해 기병대 주둔지로 삼으면서 사라졌고, 인근에 신개척리가 만들어졌다.

개척리에서 만들어진 성명회 설립 목적은 '대한의 국민이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성명회라는 이름은 "적(일본)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원통함을 밝힌다"는 의미의 '성피지죄(聲彼之罪) 명아지원(明我之寃)'에서 땄다. 

 

성명회는 이어 8월 26일 합병무효를 천명하는 선언서를 여러 언어로 작성해 미국과 프랑스 정부 등으로 보냈다. 지금의 청원서처럼 뒤에는 서명인 연명부를 첨부했는데 그 숫자가 8천624명에 달했다. 

 

성명회는 선언서를 통해 "한국인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인의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히며 해외 열강들이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고 한국인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00여 장에 달하는 '성명회 선언서' 한 질이 보관되어 있다. 100장이 넘는 이유는 선언서 뒤에 붙은 중국·러시아 한인들의 서명부가 그만큼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민족의 반대결의와 독립의지를 천명한 최초의 선언서로 한국독립운동사를 상징하는 귀중한 자료 가운데 하나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 선언서가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을 주도했다가 1911년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가 해외 독립운동가의 동향을 기록한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의 시베리아 3편을 보면 오주혁은 1911년 7월 15일부터 1년 동안 이 사건으로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그가 1912년 유배를 갔다고 나오는데 이 문서의 생산연도가 '메이지(明治) 44년 8월 5일'인 점을 보면 1912년이 아닌 1911년이 확실하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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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회 사건 등 해외 국권회복운동의 무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의 1910년대 전경. /민속원 제공

소무의도 유배생활이 그의 독립운동 생애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가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기 한달 전 동향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105인 사건'에 휘말려 유배처분을 받고 이미 대무의도에 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화에서 의병 활동과 교육사업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에서는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는 이동휘는 앞서 한북학회에서 오주혁과 만나 교류를 해왔다. 둘은 또 나란히 해외로 망명해 각자의 단체에서 독립을 도모하던 차였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은 이동휘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생애를 정리했는데 기사에 "어떠한 사건으로 오주혁과 같이 황해도 백령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유배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이 됐기 때문에 기사에 나온 백령도는 무의도의 오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부고 기사에서 오주혁과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단지 알고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대무의도와 소무의도는 지금은 인도교로 연결돼 있는 사실상 하나의 섬이다. 

 

두 섬의 거리가 500여m에 불과해 언제든지 왕래가 가능했던 곳이기도 하다. 둘은 당시만 해도 인천의 외딴섬이었던 무의도에서 훗날을 기약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원대한 꿈을 나눴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유배 이후의 오주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과 연구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동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주요 사건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러시아 한인사회 우두머리급 지도자였던 이동휘는 1914년 12월 30일 하바롭스크 이남 순회를 마치고 오주혁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이상설이 앞서 1월 19일 러시아 지역 항일단체 '권업회'를 탈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후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충청도 출신의 '기호파' 이상설은 권업회를 주도했던 함경도 출신과 갈등을 빚어왔다. 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기사에는 이상설 탈퇴 후 재정비된 권업회 간부 명단이 나오는데 오주혁이 교육부장으로 기재돼 있다. 

 

권업회는 1911년부터 러시아가 대일 관계를 우려해 강제 해산한 1914년까지 교민의 단결과 기념일 행사를 명분으로 항일독립운동 의식을 전파했고, 회원수는 8천500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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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혁의 소무의도 유배 처분 내용이 담긴 일본 외무성 자료. 왼쪽에서 두번째 줄에 '경기도 인천부 소무의도에 거주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선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주혁은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확대·개편해 만든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한다. 

 

이는 임시정부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 이동휘가 선전부장으로 장정 모집과 군사훈련을 담당했고, 오주혁은 군자금 모집 역할을 맡았다. 이동휘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오주혁은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대한국민군, 군무독군부가 연합해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 제1군사령부 참모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흑룡강성에 조직된 항일무장단체 혈성단 일원으로 일제에 항거했고, 1936년 고국의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고 타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주혁은 러시아를 무대로 했던 독립활동가들이 그러하듯 사회주의 색깔론에 의해 외면당하다 2006년에서야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있다. 2018년 독립유공자 후손의 특별귀화법에 따라 오주혁 외증손자의 부인 설순화(62·여) 씨가 특별 귀화했다.

만주·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오주혁은 성명회 사건의 주역이었고 러시아와 중국 항일 단체에서 활동을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평가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오주혁의 형제와 자식들도 독립운동을 위해 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주혁만 뒤늦게 애국장을 받았을 뿐이라 아쉽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