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항일운동에 거의 빠짐 없이 이름이 등장하나 그가 주인공으로서 주목된 적은 없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오주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에서 '성명회(聲明會)'라는 항일 조직을 이끌면서 일제의 강제합병이 부당함을 세계 각국에 호소했다.
이 때 만들어진 성명회 선언서에는 중국과 러시아 한인 8천624명이 서명해 뜻을 같이 했다.
성명회 사건으로 러시아에서 쫓겨난 오주혁은 1911년 일제로부터 거주제한의 조치를 받고 인천의 외딴섬으로 귀양 보내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묶인 몸이 됐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 러시아·만주 항일 운동가의 대부 이동휘가 한 달 먼저 대무의도로 유배를 왔고, 그와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훗날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벌일 수 있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2006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오주혁은 간단한 연보조차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
정부의 공식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조차 그가 소무의도에 유배됐던 해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인천에서라도 그의 행적을 연구하고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독립유공자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조차 구하기 어렵다. 권업회와 대한국민의회, 혈성단 등 해외 항일단체에 참여한 화려한 이력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연구 상황이다.
해외 항일운동을 주로 연구한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성명회 사건 하나만으로도 오주혁은 중요한 인물인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며 "인천에서라도 그를 기억하고 조명해줬으면 하는 바람" 이라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