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터울로 장봉도서 태어나 둘 다 인천고 졸업… 은행 그만두고 나란히 독립운동 길 나서
형 이을규 대동단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로 옥고, 동생 정규 일본서 2·8독립선언대회 동참
1921년 함께 중국행 '아나키스트' 왕성한 활동중 혁명고취 논문으로 동생 '징역 3년형' 고초
해방후 각각 이승만정권 감찰위원·성균관대 총장지내… 형만 '유공자 서훈' 재조명 목소리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난 이을규(1894~1972)·이정규(1897~1984) 형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무렵 인천고등학교(옛 인천공립상업학교)를 함께 다녔고, 졸업 후 독립운동 동지가 됐다.
이을규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망명 사건을 주도했던 대동단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계 아나키즘 사상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두 형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죽음과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열하게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다.
이을규는 의친왕의 바로 옆에서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냈던 중요한 인물로 1990년 독립유공자 애족장 서훈을 받았지만, 이정규는 생전에 본인의 뜻에 따라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지 않아 공훈기록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천의 독립운동가로서 이들의 생애와 독립운동 궤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각각 1894년과 1897년 인천 장봉도에서 태어났다. 정부 공식 문서라고 할 수 있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과 백과사전에 이을규를 소개하는 글에는 충남 논산이 본적으로 돼 있으나, 이을규·정규 형제는 생전에 인천 장봉도 출신임을 분명히 밝혀왔다.
일제의 강제 병합이 있던 해인 1910년 이을규가 먼저 인천고에 입학했고 이듬해 동생 이정규가 입학했다. 현재 졸업기수로 따지면 13회, 14회다.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1910년대 초반 학교는 교장과 교사들이 일본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교사는 제복을 입고 수업에 들어왔다. 인천고도 마찬가지였다. 이을규·정규 형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과 강압적인 교육에 대한 반발심이 커졌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학업에는 성실히 참여했다. 형 이을규는 수석 졸업생이었다. 지금의 도덕 교과목인 수신(修身)과 이과(理科) 분야 성적이 특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이정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형제는 장봉도 출신인데 인천에서 운수업을 하던 큰 형을 따라 나왔다.
이들의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이을규는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정규는 인천 우각리(현 동구 금창동)에 있던 인명의숙을 졸업하고, 인천고에 진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형제는 은행에 취직했지만,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반발해 둘 다 사직했다. 그리고 나란히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이을규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해 1919년 11월 '의친왕 망명사건'에 참여한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망명시킨 뒤,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포고문을 중국과 우리나라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대동단을 소개하는 '대동단실기'를 집필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신복룡 명예교수는 "대동단은 조선 왕조 왕실이 (한일)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친왕의 입을 통해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이을규는 의친왕을 중국 안둥현(安東, 현 단둥(丹東))까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국까지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의친왕의 탈출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고비 때마다 이을규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서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신분을 위장해 3등 칸에 탔다고 한다.
일본 경찰 검문에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해 모면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과 이을규는 중국 안둥현에 도착했으나, 의친왕 망명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동생 이정규는 일본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게이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일원으로 2·8독립선언대회에 참가했다.
이을규는 감옥에서 출소한 1921년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한 동생 이정규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형제는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
베이징 대학에 진학한 이정규는 러시아의 시인 에르셍코와 교류하며 아나키즘 사상가로 성장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을 아나키즘 사상가로 인도한 이가 바로 이정규다.
그는 아나키즘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정규는 훗날 저술한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회영 선생이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오랜 시간 동안 문답을 하게 됐다. 이것이 선생으로서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내용을 들어보는 첫 번째 기회였다. 이때는 마침 선생이 사상적인 진로 모색을 하던 때였으므로 이정규와의 대화는 선생에게 큰 충동을 줬다."
이정규의 영향으로 형 이을규도 아나키스트가 됐다. 형제는 1924년 4월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외세에 의존하는 타협론과 소련에 기대는 공산주의 세력을 함께 비판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직접 행동노선을 주장했다.
상하이로 가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것도 이 시기다. 일본 첩보단이 작성한 의열단원 명부에 이들 형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심 간부로 올라 있다.
아나키스트 사상가로서 이정규의 활동은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난징에서는 대만·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항일지사들과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열고 기관지 '동방'을 발행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기관지 '탈환'을 간행했다.
그러던 중 탈환에 기고한 논문이 결국 일본의 감시망에 걸렸다. 이정규는 탈환에 '탈환에 제일성', '혁명원리의 탈환'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논문을 가명으로 기고했는데, 일본은 이 글이 조선의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정규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주 하이린을 근거지로 했던 이을규도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회영의 지시를 받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와 연합하는 활동에 전념했는데,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화암 정현섭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이라는 책에서 "그 무렵 만주에서는 이른바 사상 문제로 우리끼리 더 많이 죽였어요. 공산당이라고 잡아 온 젊은이를 죽이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만주에 있을 때 왜놈보다도 우리 동포인 공산주의자가 무서워 잘 때도 신을 신고 옷을 입었습니다."고 1920년대 말 만주의 상황을 설명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됐고, 일본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이을규는 국내로 압송돼 5년이나 투옥하게 된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나키스트 형제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농민 스스로 자치 능력을 기르기 위해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자치연맹을 각 지역에 조직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을규는 1953년 이승만정권에서 초대 감찰위원을 지냈고, 196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72년 서울 동대문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생애 말년에 번역했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저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은 사망 이듬해인 1973년에야 출간됐다.
이정규는 1963~1966년 성균관대 총장을 지냈고, 전 재산을 출연해 아나키즘 연구 단체 (사)국민문화연구소를 만들었다. 1984년 사망한 그는 생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인천 출신인 이원규 작가는 "삼형제 중 두 명이 목숨을 내놓은 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국내 아나키스트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인천시 등이 나서서 이제라도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해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