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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기숙사 '모네트홀'에 앉아 있는 김란사. 벽면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

조선말 개항장 감리지낸 남편따라 인천과 인연

'뜨거운 학구열' 기혼녀임에도 이화학당 입학
독립운동가 서재필 연설에 '감동' 미국行
웨슬리언대서 한국 여성 최초 '문학사' 학위
귀국후 고종 통역役·이화학당서 첫 여성교수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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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사(金蘭史·1872~1919)는 시대를 앞선 여성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문학사'(Bachelor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고,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당시 여성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도 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河相驥·1855~1920)는 조선 말기 인천 개항장의 사법·행정과 국제업무를 총괄한 인천감리를 여러 차례 지낸 고위 관료였다.

하상기는 김란사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여기에서 김란사와 인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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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이 1966년 이화여대에 보낸 김란사의 학적 확인 답장.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제공

올해는 김란사 서거 100년이 되는 해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는 여전히 빈 칸 투성이다.

 

김란사와 관련해 근래에 쓰인 글들마저 출생연도, 유학 과정, 사망 경위 등이 제각각이다.

이름조차도 수년 전까지 남편의 성씨를 따랐던 '하란사'로 불렸다.

정부는 1995년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할 때 '하란사'로 표기했던 성명을 지난해 2월에서야 본래 이름으로 정정했다. 김란사의 생애를 제대로 복원하기 위한 연구가 절실하다.

김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부터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일화를 남겼다.

이화학당 교장을 지낸 선교사 룰루 프라이(Lulu E. Frey·1863~1921)는 교사로 재직할 당시 김란사의 입학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기혼 여성을 받지 않는 게 이화학당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김란사가 밤중에 이화학당을 직접 찾았지만, 프라이는 재차 입학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김란사는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훅하고 불어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등불같이 매우 어둡다"며 어머니들이 배워 자식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이화학당은 교육비용을 자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김란사의 입학을 허락했다. 프라이는 이 같은 내용을 1895~1896년 미국으로 보낸 이화학당 운영보고서에 담았다.

김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김란사와 하상기가 함께 1895년 봄 일본 도쿄에 있는 경응의숙(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유학을 갔다는 내용의 조선정부 문건들을 고려하면, 이화학당은 1894년쯤 들어갔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조선정부는 자비로 일본 유학 중인 김란사를 장학생(관비 유학생)으로 포함해주기도 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김란사는 미국 유학파 독립운동가인 서재필(徐載弼·1864~1951)의 정동교회 연설에 감화돼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20년 1월 22일자에 실린 '세 애국여사의 추도회' 기사에 이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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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의 김란사 학적부.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

김란사는 1897년 말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남편도 동행했다가 곧 귀국했다. 이때부터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서 '하란사'라는 이름을 썼다.

유학 초기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 예비과정 또는 '디커너스 트레이팅 스쿨'이라는 예비학교에서 수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에 입학해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김란사의 조카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제공한 웨슬리언대학 학적부를 보면, 김란사는 3년간의 예비과정을 마치고 본과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는 과학 전공을, 2~3학년 때는 문학 전공을 이수했다. 이름은 'Hahr, Nansa Kim Mrs.'라고 본래 성씨와 남편 성씨를 함께 썼다.

직업은 주부(Housewife)와 교사(Teacher)라고 표기돼 있고, 주소는 서울 이화학당으로 돼 있다.

이화여대가 1966년 웨슬리언대학에 김란사의 학적을 문의한 적이 있는데, 웨슬리언대학의 답장에는 "당시에 전공과목이 따로 없었을 때였으나, 그(김란사)는 영문성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나온다.

김란사는 유학시절 웨슬리언대학 기숙사인 모네트홀에서 지냈다. 이화여대 이화역사관이 소장한 사진 속 김란사의 기숙사 방에 걸린 태극기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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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95년 8월15일 김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사진 오른쪽)로 성명을 표기했다. 김용택씨 등 후손들의 요청으로 지난해 2월 훈장증 성명을 본래의 이름인 '김란사'로 정정했다.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기념사업회' 회장 제공

긴 유학생활을 마친 김란사의 귀국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8월 18일자 신문에서 '전 농상국장 하상기 씨 부인이 미국 화성돈에 가서 유학한 지 10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환국하여 동문 외본제에 주재한대 성 내외 사부가에서 여자교육을 부탁하는 이가 다다(多多)하다더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고종의 후비인 엄황귀비(1854~1911)는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김란사의 자문을 받았다. 김란사는 고종의 통역을 맡으며 황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1909년 5월 경희궁에서는 '여성 해외유학생 환영회'도 열렸다. 김란사,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 일본 유학생 윤정원(尹貞媛·1883~?) 등 해외 유학파 여성 3명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부인단체를 중심으로 마련한 행사다.

궁궐에서 개최한 만큼 황실과도 교감을 가진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단체 대표들이 연설을 하고, 주인공 3명이 답사를 한 뒤 여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생잡지 '대한흥학보' 제3호(1909년 5월 20일 발행)는 환영회에 700~8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전했다. 같은 해 고종은 세 여성에게 직접 은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의친왕 파리강화회의 파송 '밀사'로 가던중
중국서 급사… 199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
서거 100년 불구 사망 경위·행적등 연구 미흡

김란사는 1907년부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고, 이어 총교사(교감)로 승격했다.

조선일보의 첫 여성 기자인 최은희(崔恩喜·1904∼1984)가 생전에 쓴 여성 열전을 묶은 책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2003)의 '하란사'편에서는 기숙사 사감인 김란사가 호랑이 어머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엄격하고, 욕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썼다.

1910년 9월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개설하면서 김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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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경응의숙에서 유학한 조선 관비유학단이 1896년 친목회보에 실은 단체사진. 사진 속 하얀 한복을 입은 여성이 김란사다. 김란사 바로 왼쪽이 남편 하상기다. /이원규 작가 제공,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교수 재직 시절에는 개화파 인사인 윤치호(尹致昊·1866∼1945)와 선교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여성교육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치호가 해당 잡지에 신(新)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을 먼저 기고했고, 김란사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김란사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선정돼 다시 미국을 찾았다.

이후 2년여간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쳤다.

도산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교민들에게 김란사의 모금활동을 돕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재미동포들의 모금으로 1918년 설치한 정동제일교회 파이프오르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었고, 동양에서는 두 번째였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2003년 복원됐다.

고종은 1919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을 파송할 계획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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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회의에서 한일 강제병합의 부당함과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유학한 의친왕과 교류가 있는 김란사도 밀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김란사의 파리강화회의 비밀 파송과 관련한 공식적인 문건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신문기사와 해방 이후 관련 인사들의 자서전 등을 통한 후일담만 남아 있을 뿐이다.

파리로 향하던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유행성 독감이라는 기록도 있고, 분사(憤死)했다거나 독살당했다는 설도 당시 떠돌았다.

김란사의 독립운동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해 미진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