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강화 출생… 1920년대 日 문화식민지배 시기
소년회등 이끌며 계몽활동·항일정신 전파
인천노동총연맹·조선공산당 간부 역임도
공산당 경력과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활동 이력 탓에 그의 항일정신은 아직도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8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유두희의 항일독립 활동을 진실로 규명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결정문을 뛰어넘는 추가 연구와 재평가는 미진하다. 기대했던 독립유공자 서훈도 이뤄지지 않았다.
1901년 12월 24일 강화에서 태어난 유두희는 1920년대 초반 인천 지역에서 소년·청년 운동을 주도했고, 1927년에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이끌었다.
제4차 공산당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르고 해방 100일을 맞기도 전인 1945년 11월 11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생애 마지막을 보냈다고 한다.
민족·사회주의 항일단체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 주도
제국주의 맞선 계급투쟁 4차 공산당사건으로 고초
해방 맞은 해 고문 후유증 지독한 가난속 숨져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식민지배 노선을 변경했고, 1920년대부터 사회단체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론사와 문화·체육·노동단체가 생겼고, 민족주의로 무장했던 항일운동에 사회주의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과 러시아 망명지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흡수한 독립운동가들과 일본의 유학생들이 한반도에 이를 전파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투쟁은 일제의 수탈에 대응할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 흐름은 인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 따르면 1920년대 인천에는 55개의 청년단체와 25개의 소년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계몽적, 교육적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
유두희가 주축이 돼 1924년 7월 5일 인천 영화학교 강당에서 창립한 인천소년회도 그 80개의 청소년 단체 중 하나였다.
소년회는 겉으로는 가극과 동화구연 행사 모습을 띠었지만, 어린 학생과 청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인천소년회는 1925년 11월 8일 제물포청년회와 공동으로 전인천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유두희는 인천소년회 외에도 인천청년연맹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대중 강연에 자주 나섰다. 1926년 1월 15일 독일의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그 사망 7주기를 맞아 기념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개입으로 무산됐다.
그는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인천노동총연맹과 인천청년노동조합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4월에 설립된 인천노동총연맹은 노동자 쟁의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 폭력조직 '상애회'와 투쟁을 선포했고, 유두희는 이승엽과 함께 재일본노동자총연맹과 연대하기 위한 일본 특파원으로 선발됐다.
그의 크고 작은 활약은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26년 6월 23일 동아일보는 인천의 한 정미소에서 직원 100여명이 일본인 감독관의 구타를 견디지 못해 파업에 돌입한 사건에서 유두희가 불량 감독관의 퇴직을 두고 벌인 정미소 측과의 교섭에 대표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유두희는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의 주역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만든 항일운동단체다. 유두희는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에 깊숙이 가담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는 신간회 인천지회가 시국강연과 계몽활동을 활발하게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유두희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역 간부로서 활동하다 1928년 7월 27일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4월 18일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와해 됐다가 2차, 3차, 4차에 걸친 재건을 시도했지만 결국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의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일제는 공산주의 계급투쟁이 결국 자본을 바탕으로 둔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정면으로 맞서는 위협이라고 인식해 이들을 탄압했다.
구속을 하고도 재판을 질질 끌어 일부러 구금기간을 늘렸고, 유두희는 4차 공산당사건으로 치안유지법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4년형이 선고됐으나 실제 감옥에 갇혀있던 기간은 5년이 넘었다.
당시 연해주 한인 공산당 기관지 '선봉'은 유두희 등 4차 공산당사건의 국내 재판 소식을 전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다가 공판 없이 2~3년을 가둬두고 육형의 고문으로 거의 생명을 빼앗고는 소위 치안유지법이란 악법의 죄를 씌워 공판에 끌어내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발악을 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두희의 판결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국기기록원의 서고 어디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동지들의 판결문으로 유두희의 행적을 짐작할 뿐이다.
당시 4차 공산당사건으로 같이 재판을 받은 이광, 조기승, 박경호 등의 판결문을 보면 일제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도함으로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프롤레탈리아나 독재 사회를 세우고, 이를 통해 공산 사회의 실현을 원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혈망하거나 조선을 일본제국의 기반에서 이탈시키고자 하였다"고 이들의 혐의를 적시했다.
유두희는 1933년 8월 20일 출옥했지만, 그가 사망한 1945년까지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1934년 인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독서모임(적색독서회)을 결성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신문 기사 한 줄로 그가 인천에서 꾸준히 단체 결성에 나섰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인천의 향토사가 신태범 박사(1912~2001)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노동공제회 인천지부가 인천노동총동맹으로 개편되어 용동에 간판을 걸고 유두희가 해방 때까지 유지해왔으나 눈에 띌 만한 활동은 없었다"고 했다.
유두희는 해방되던 해 11월 11일 생활고를 겪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만다.
대중일보는 '오호 동무여 왜 먼저 갔느냐'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부고를 타전하면서 "옥중생활에 득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중 소위 대동아전쟁 이래 기막히는 탄압아래 기아와 고질로 극도의 생활난과 악전고투하다가 1945년 11월 11일 사망. 인천부 화방정 자택에서 동지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했다.
2008년 진실화해위서 '독립활동 진실 규명' 불구
사회주의 노선탓 재평가 미진… 유공자 서훈 못받아
사망 이듬해인 1946년 5월 1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천지부 등 60개 단체가 참여한 메이데이기념식에서 그는 항일 활동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는 받지 못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권평근은 2005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음에도 유두희는 깜깜 무소식이다.
수면 아래 잠자던 유두희의 항일운동 행적을 진실이라는 뭍으로 끌어올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유두희의 자녀들과 면담해 행적을 복원하려 했으나 큰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80세가 넘은 장남 대관 씨는 아버지 유두희가 숨질 무렵 고등학생 나이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청소년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소위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10여 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유두희의 항일운동 진실을 규명했던 윤명숙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조사팀장은 "유두희의 아들은 1940년대 일제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됐던 분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며 "진실 결정문을 유가족에게 전달해 주고 서훈 신청 여부를 확인해 봤지만 아직 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규명 작업은 2006년 당시 영화여자정보고등학교 교사이자 향토사 연구자인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의 신청으로 이뤄졌다.
유두희의 말년 행적이 '눈에 띌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를 읽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좌익 활동가였던 유두희 선생이 평가절하 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었다"며 "진실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