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서 태어나 신학문 공부 교직생활하다 1912년 27살에 인천 도서지역 명덕학교 부임
가정학습·마을 궂은일 '앞장' 어린 나이에 존경받아… 천도교 통해 서울 3·1운동 참여
돌아와 제자들과 '만세운동' 준비 4월 9일 학교 운동회로 사람들 불러모아 "독립" 외쳐
日경찰 혹독한 고문 35살에 사망 광복후 주민들 추모비 세워… '섬'탓 활동 아는이 적어
인천 중구, 동구와 계양구 황어장터, 강화도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대규모 만세 시위가 일어나며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민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까지 인천시나 각 지자체 주도로 진행된 3·1운동 기념행사는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나 계양구 황어장터에서 열리고는 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옹진군은 3·1운동 기념식을 덕적도에서 열었다. 1919년 덕적도에서 울렸던 만세 함성이 100년을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덕적도에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1884~1919)이다.
그가 덕적도에 머물던 시간은 8년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덕적도와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을 돌며 독립이 왜 필요한지를 주민들에게 전파했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소규모로 이뤄진 데다, 접근이 쉬운 인천 시내 독립운동과 비교해 관련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그의 행적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임용우 선생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김포 통진에 있는 창신학교에서 4년여 동안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 모교에서 3년여 동안 교직 생활을 했던 임용우 선생은 1912년 27살 나이로 덕적도 명덕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1910년대 당시 덕적도 주민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해 민어 파시의 중심지이기는 했으나, 어업권을 일본에 계속 빼앗기고 있었다. 어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덕적도 주민들에게는 큰 피해였다.
일제는 우리나라에 식민어촌을 건설하고 일본의 어부들이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07년 '한국수산지'를 발간해 일본 어민을 돕는 지침서로 사용했다. 1908년에는 어업법, 1911년에는 조선어업령을 시행하면서 모든 어민이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면허를 받도록 했다.
일제는 당시 어업면허의 종류를 세분화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신식 어업은 일본 어민에게만 허가하는 등 우리 어민을 차별했다.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당시 덕적도 주변 해역에서 주로 잡히던 어종은 민어였다.
민어 조업에도 일본은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1923년 9월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그해 덕적도 인근에서 출어한 어선 528척 중 일본 어선은 90척에 달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덕적도 주민들이었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다. 향토사학자 김광현이 1985년에 출판한 '덕적도사'에서는 1910년대 초기 덕적도에는 명덕학교, 명신학교, 합일학교 등 3개의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광현은 "(덕적도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부녀자까지라도 한글 정도는 해독할 수 있게 됐고, 시대의 변천과 교육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에 유의한 인사들이 규합해 학교를 잇따라 설립했다"고 적었다.
명덕학교에 부임한 임용우 선생은 밤이면 각 가정에 방문해 학생들의 가정학습을 지도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짚신을 만들어 팔아 학교 경영에 보탬을 줬다고 한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도왔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덕적도가 고향인 송은호(86) 옹은 지난 5월 31일 경인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나이가 어려 임용우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삼촌이나 아버지가 평소에도 임용우 선생의 말을 인용해 나를 가르쳤다"며 "돌아가신 지 한참 지났을 시점이었으나, 마을 사람에게는 스승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명덕학교 교사로 일한 지 7년이 흐른 1919년 2월 임용우 선생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서울에서 대규모 만세 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니 서울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가서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인 김포에 내려왔다.
이곳에서 3·1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3월 29일 수백명의 주민들과 함께 김포 월곶면 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당시 독립운동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민창식 등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덕적도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임용우 선생은 섬에 들어오자마자 명덕학교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내륙 지방의 '장날'과 같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날을 잡기 어려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임용우 선생은 학교 운동회를 개최해 주민들을 불러 모으자고 제안했고, 4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9일 덕적도 주민들은 진리 해변에 모였다. 주민들은 우선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 체육 행사를 진행했다.
체육 행사가 마무리된 뒤, 임용우 선생은 독립 선언을 외쳤고 그를 따라 많은 주민도 독립 만세를 불렀다.
덕적도 출신으로 해방 후 감리교 통합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우 목사는 그의 자서전 '나의 목회 반세기'에서 "해변에서 운동회를 하던 중 동네 사람과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태도에 겁을 먹은 것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선총독부가 3·1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날 독립운동에 대해 '학생 50여명, 학부형 30여명이 모여 종이로 태극기 10장을 만들어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와 합일학교, 명신학교의 학생과 주민의 수를 고려하면 100~300여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진리 해변에서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도 주민들은 국사봉 등 마을 뒷산과 주요 거리에서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인응은 자신이 운영하는 덕적도에 딸린 작은 섬 울도 사숙(私塾)에 돌아가 학생 2명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문서를 살펴보면 임용우 선생은 만세 운동을 벌인 뒤, 4~5일 이내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임용우 선생의 제자였던 이정옥은 생전에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선생님(임용우)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했다"고 진술했다.
임용우 선생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에도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1919년 5월 9일 임용우 선생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제자들과 1심 판결을 받았다.
주동자였던 그는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6개월~1년 형이 선고됐다. 제자들은 곧바로 항고했으나, 임용우 선생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심문 도중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선고 이튿날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순종황제 붕어하시고 3·1 운동이 궐기할 시에 본명 사립 명덕학교 선생 임용우씨가 주최로 합일학교 교사 이재관씨 차경창과 비밀 연락해 기미년 3월 10일(음력으로 추정)에 대 운동회를 개최하고 면민 전반이 대회합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며칠 후에 주최자 3인은 일본 경찰관에게 납치돼 임 선생은 가혹한 고문에 절명케 돼 출옥 치사하니 아-슬프다. (중략) 한국은 해방이 돼 왜적은 그림자를 감추게 되니 애국의인이며, 애국열사의 선혈은 헛됨이 아니었다. 1948년 해방 직후 3월 1일에 임 선생의 영세불망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1절에 추도식을 행하니 몸은 지하에 돌아갔으나 영은 천추에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 3년이 되던 1948년 덕적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덕적중고등학교 앞에 세운 비석에 임용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 남아 있다.
송은호 옹은 "비석이 세워질 때, 마을 어르신들이 '참 훌륭하신 분이 먼저 가셨다. 이제라도 위로를 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임용우 선생은 덕적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육지와 떨어진 작은 섬에서 독립운동에 불씨를 당겼다.
덕적도 주민들은 조국이 해방된 직후부터 그를 추모해 왔지만, 대부분 인천 시민들은 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부터라도 외딴 섬에서 임용우 선생이 펼친 독립운동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