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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창 목사 존영이 전시된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제공

이동응 목사 서울 성경학원 재학중 3·1운동 참여 독립선언문 버선 속에 숨겨 귀향
임용우 선생 도와 만세외쳐… 기독교계 '日기업 술·담배 절제운동'·학교 설립 활동
덕적도 출신 차경창, 교사 재직중 만세운동 '옥고' 목사 전향 日 비판설교 감시당해
성직자 신분 '한계' 전면에 나서지 못한채 독립사상 전파… 단편적인 자료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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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옹진군 덕적도 3·1 운동은 기독교 신자들이 주축이 돼 이끌었다.

이동응(李東應, 1881~1967) 목사와 차경창(車敬昌, 1901~?)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덕적도는 기독교가 이른 시기부터 자리 잡은 지역 중 하나여서 섬 주민 중 기독교 신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들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육로보다 더 편리한 해상교통을 선호했다.

이 시기 인천의 섬들은 황해도와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등 한반도 서부권으로 나아가는 뱃길의 길목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가던 선교사들도 인천 앞바다 섬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화도 등 인천 지역 섬에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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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김광현이 쓴 '덕적도사'에 따르면 덕적도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해는 1901년이다. '덕적도사'에서는 10년도 안 된 기간에 기독교가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홍석창이 지은 '제물포지방 교회사 자료집 1885~1930'에서는 당시 덕적도 기독교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덕적 구역은 남양에서 떨어져 있는 세 섬들로 구성돼 있는데, 몇 년 동안 덕적도가 그 섬들의 중심으로서 그 구역의 목사와 사업의 시작을 주도했다. 이 섬들 중 두 곳에 각각 세 개의 모임들이 있다. 한 해 동안 두 개의 교회가 건축됐다."

전문가들은 덕적도에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유입될 수 있었던 이유로 교회와 학교가 함께 설립된 것을 꼽는다.

 

인천섬연구총서 '덕적도' 집필에 참여한 인하대 프론티어학부대학 최인숙 강사는 "덕적도 지역은 예로부터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다. 이곳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교세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마을에 교회를 세울 때마다 학교를 설립해 근대교육을 받게 만들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 유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 덕적도에 있던 명덕학교와 명신학교, 합일학교는 덕적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토대가 됐다. 

 

이 학교 출신들은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 선생을 도와 덕적도 3·1 운동을 주도했다. 

 

3·1 운동 이후에도 인천과 전국 곳곳에서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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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응 목사. /영종중앙교회 제공

합일학교에서 공부했던 이동응 목사는 덕적도 3·1 운동에 불씨를 지핀 인물이다.

향토사학자 이훈익의 저서 '인천지방향토사지'에 나온 기록을 살펴보면 이동응 목사는 1919년 서울 성경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그는 고향인 덕적도로 내려오면서 독립선언문 한 장을 버선 속에 숨겼다. 

 

이동응은 그의 조카이자 임용우(1884~1919) 선생의 제자인 이재관(1897~1989)에게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전하고, 밤을 새워 가며 선언문 100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때 마침 경기도 김포에서 만세운동을 했던 임용우 선생도 덕적도로 돌아왔고,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임용우 선생과 이재관 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5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이동응 목사에 대한 재판 기록은 없다. 

 

이 때문에 그가 실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인천지방향토사지' 등 여러 출판물에서 이동응 목사가 덕적도 3·1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술한 점을 고려하면 그가 덕적도에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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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도에서 바로본 덕적도와 주변 섬의 모습. 인천에서 배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덕적도는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해변과 소나무숲, 바다낚시 등으로 유명하다. /경인일보DB

3·1 운동 이후 이동응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부터 7년 동안 장봉도 옹암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근무한 그는 절제운동을 벌였다.

절제운동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하나로 추진됐다. 일본 기업이 대부분 이익을 가져가는 술이나 담배를 줄이자는 게 절제운동의 목표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령을 시행했다. 주세령은 각 가정에서 이뤄지던 자가주조를 금지하고, 주조업을 기업화·대형화시켜 안정적인 세액을 확보하고자 추진된 정책이다. 

 

주세령이 시행된 이후 1920년 조선총독부의 전체 세입 중 7%가 주류에 의한 세금일 정도였다.

기독교계에서는 절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28년 1월 '기독신보'는 사설을 통해 '동포여, 죠션(조선) 안에서 술 담배로 소비되는 돈이 총합 10억1천989만3천824원(당시 330㎡ 기와집 1만여채 값)입니다. 동포여, 우리의 당면한 대 문제를 해결함이 오직 금쥬 단연함에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절제운동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장봉도 옹암감리교회 92년사'에 따르면 이동응 목사는 찬송 형태의 '금주가'를 만들어 어린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시작으로 어른들의 금주 활동도 추진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금주·단연 청년회도 조직했는데, 기독교계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925년 '기독신보'는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서 금년(1925년) 1월에 이동응, 이용의 씨의 발기로 금주 단연 청년회를 조직하고 사무를 진행했는 바 불신자 청년의 금주단연은 더욱 가상한 일이라고 칭송이 높더라'고 이동응 목사의 활동을 소개했다.

강화 석모도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이동응 목사는 학교 시설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당시 지식인들은 민중계몽운동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농촌지역에 학교를 설립해 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이동응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던 강화도 석모도에는 1908년 세워진 부흥여학교(초기 이름 합일여학교)가 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1920년 이동응 목사는 수천원의 기금을 모금해 10여 칸 되는 기와집 교사를 신축했다고 한다. '강화 기독교 100년사'에서는 부흥여학교 교사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학생 전원이 30명에서 70명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이동응 목사는 석모 지역 유지 김창진, '강도지'를 펴낸 박헌용과 함께 석모도에 있는 옛날식 서당을 하나로 통합해 '육영의숙'을 세웠다. 이곳의 학생은 100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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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창 목사. /차경창 목사 가족 제공

덕적도 출신 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는 이동응 목사뿐만이 아니다. 

 

임용우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차경창 목사도 독립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차경창 목사는 임용우 선생이 교사로 있던 명덕학교를 다녔으며, 합일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임용우 선생과 함께 3·1 운동을 벌였다.

그의 재판 기록에는 "덕적면 진리 명덕학교 운동회에서 임용우, 이재관과 모의해 학생 수십명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등 치안을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른 차경창 목사는 그곳에서 목회자로 전향했다.

차경창 목사는 인천 영흥도와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등지를 돌며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일제를 비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이 담긴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차경창 목사는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차경창 목사의 큰아들인 차현회(91) 목사는 12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설교할 때, 항상 일본 경찰은 예배당 시계 밑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총독부가 이래서는 안 되고, 우리 국민들도 나라를 위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이러한 이유로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원주경찰서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항상 경찰서를 들락거렸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설교를 했다"며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컸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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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창 목사 판결문.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6·25 전쟁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에서 재직하던 차경창 목사는 납북돼 행방불명됐다. 

 

그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생활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남조선노동당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 이승엽(1906~1953)이 그를 데려갔다는 게 차경창 목사 가족들의 설명이다.

차현회 목사는 "이승엽 위원장이 발판이 필요했을 테고, 당시 유명한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를 포섭했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고심 끝에 이승엽 위원장 비서를 따라갔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동응 목사와 차경창 목사는 고향인 덕적도의 독립운동 불씨를 당겼다. 이들은 섬이나 농촌 지역 주민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주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 단편적인 자료밖에는 남아있는 게 없는 실정이다.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목회자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을 돌며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며 "덕적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역사의 일부분을 차지한 이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