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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국모 원수갚기' 목적 일본인 살해 체포돼 인천감리서로 이송·심문
조선 관리·일본인 꾸짖으며 '유명세' 미결수 신분으로 '기약없는 감옥생활'
강화도 재력가 김주경 구명운동 펼쳤으나 부패한 조정 손못써 '탈옥' 권유
1898년 간수 눈 피해 쇠창으로 땅 파 빠져나와 용동·만수동등 거쳐 서울로
일지에 첫 번째 옥살이관련 자세히 남겨… 기록 복원·콘텐츠화 작업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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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그 이듬해 삼남지방 순시에 나선 71세의 백범 김구(1876~1949)는 가장 먼저 찾은 인천에 대해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

김구는 인천에서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자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를 진정한 의미의 '백범 김구'로 만든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임에 틀림없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인천 감옥살이와 탈옥과정, 그를 도운 인천 인물들을 소상히 기록했다.

몇 년 전부터 백범 탈출로 등 '백범일지' 속 인천 기록을 복원하는 노력이 일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디테일'은 부족하다.

'백범일지'를 더 꼼꼼히 살피고 역사적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돼야 비로소 김구가 인천의 '콘텐츠'로 탄탄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

강화 김주경 댁 방문 (1946년11월)
1946년 11월 강화도 김주경의 집을 찾은 김구. 김주경은 김구가 인천감리서에서 옥살이할 때 구명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김구는 해방 후 귀국하자마자 김주경, 윤봉길, 이봉창의 유가족부터 수소문했다. 출처/'백범김구전집' 11권

김구는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에서 첫 번째 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김창수'라는 이름을 쓰는 21세 청년이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라고 썼다.

대한매일신보사가 1999년 발행한 '백범김구전집' 3권에 실린 치하포 사건 관련 당시 일본 측 보고서를 보면, 쓰치다의 신분을 '평민(상인)'이라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 '백범김구전집' 3권 해제를 쓴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측이 상인(양민)이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 쓰치다의 신분을 소상히 공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구는 사건 현장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왜인을 죽이노라"는 글을 쓰고, 마지막 줄에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적었다.

김구는 사건이 벌어진 지 세 달이 지난 6월 말 체포돼 해주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인천감리서로 이송됐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개항 이후 설치돼 개항장과 외국인 관련 행정·사법·국제관계 업무를 맡았다.

애초 해주부에서 사건을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일본영사관이 외국인의 생명과 관계된 중대사건이라는 이유로 인천감리서에서 김구를 심문하도록 조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 인천으로 옮기게 됐다.

1984년경 인천감리서 사진
김구가 1896년 7월부터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투옥됐던 인천감리서 전경. 현 인천 중구 자유공원 쪽에서 내려다 본 사진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

김구는 '백범일지'에 현재 인천 중구 내동에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진 채 그 터만 남은 인천감리서의 모습을 남겼다. 다음은 '백범일지' 속 인천감리서와 감옥이다.

'감옥은 내리(內里)에 있었는데, 내리 마루에 감리서가 있고, 왼편에는 경무청이 있고, 오른편에 순검청이 있었다. 감옥은 순검청 앞에 있고, 그 앞에는 노상을 통제하는 2층 문루가 있었다. 감옥 주위에는 담장을 높이 쌓아올렸고 담 안에는 평옥(平屋) 몇 칸이 있는데, 그 방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편에는 미결수와 강도·절도·살인 등 죄인을 수용하고, 나머지 반쪽에는 민사소송범과 경범위반 등 이른바 잡범을 수용하고 있었다.'

김구는 불결한 감옥 안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1896년 8월 31일 인천항재판소에서 첫 심문이 열렸다.

일본정부 관계자도 배석해 심문을 지켜봤는데, 이 자리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와 일본인을 크게 꾸짖었다는 소식이 인천항에 퍼졌다. 2차, 3차 심문이 이어지면서 김구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아들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를 도와주겠다는 인천사람들이 점차 늘었다.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한 김구의 사형 판결이 연기됐다. 민심이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도 섣불리 판결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화도의 재력가 김주경(김경득)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김구에 대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주경은 "김창수를 살려내야 할 터인데, 지금 정부대관들은 모두 눈에 구리녹이 슬어서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불가불 금력을 사용치 아니하면 쉽게 방면치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주경은 고위 관료들을 만나 김구를 방면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등 7~8개월 동안 가진 돈을 몽땅 썼지만, 결국 김구를 빼내지는 못했다. 조선 말기 부패한 조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시 조정이 얼마나 썩었는지는 황현(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도 드러난다. '매천야록'에는 영동현에 사는 이용직이 100만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됐는데, 부임하자마자 포졸을 풀어 지역 부호들을 잡아들이고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매관매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였다는 게 '매천야록' 곳곳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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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 '융원필비'에 나온 삼릉창.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큰 김구의 중요한 탈옥도구였으나,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출처/'조선의 무기와 갑옷'

김구는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1년 넘게 독서에 열중했다.

이 기간 감리서 직원의 권유로 '세계역사·지지(世界歷史·地誌)', '태서신사(泰西新史)'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사상을 다듬어 갔다.

또 동료 수감자들을 가르치거나 소송을 위한 소장을 써주기도 했는데, 독립신문은 1898년 2월 15일자에 인천항 감옥 죄수 중 20세 김창수가 죄인들을 공부시키니 "옥이 아니요 인천 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옥살이가 이어졌고, 자신을 도와주던 김주경마저 전 재산을 써도 방법이 없자 탈옥을 권유하는 시를 보냈다.

김구는 아버지가 소송 문서를 전부 강화도로 갖고 가서 명망 높은 양명학자인 이건창(1852~1898)에게 방책을 묻기도 했지만, 이건창은 탄식만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김구는 탈옥을 결심하고 계획을 세운다. 1898년 3월 김구는 아버지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30㎝) 길이의 '삼릉창'(三稜槍) 하나를 만들어 새 옷 속에 싸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그가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고 즉시 삼릉형(三稜形)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넣어줬다.

이 삼릉창은 무기이면서 벽돌을 들추고 땅속을 파는 중요한 도구였다. 김구가 삼릉창을 제작해 달라고 특정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생소한 무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릉창의 형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813년 훈련도감이 편찬한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삼릉창의 모습이 실려있긴 한데, 중국의 병법서 '무비지(武備志)'에 소개된 중국식 창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 실제 제작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김구의 탈옥 도구로 쓰인 삼릉창을 고증하는 작업은 곧 한국 무기의 역사를 보완하는 셈이므로 꼭 필요하다.

김구는 탈옥 당일 밤 당번인 간수를 불러 돈 150냥을 주고 죄수한테 한 턱을 낼 것이니 쌀, 고기, 술을 사 오라고 부탁했다. 또 간수에게 50전어치 아편을 사서 실컷 먹으라고 뇌물을 찔러 주기도 했다.

그 간수는 아편쟁이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고, 간수는 자기 방에서 아편을 피우고 정신이 흐릿해 까무러져 있었다.

교역통로였던 인천항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아편 또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김탁환과 영화감독 이원태는 인천 개항장이 아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소설 '아편전쟁'(2016)을 썼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인천항의 국제적인 입지를 고려하면 충분히 해봄직 한 문학적 상상이다.

'백범일지' 속 아편쟁이 간수를 통해 당시 인천항에 아편이 만연했다는 것이 입증된다.

소설 '아편전쟁'에서는 인천 청국조계에 아편굴인 '천락원(天樂園)'이 등장하는데, 아편을 단속해야 하는 감리서 순검까지 들락날락한다. 손님이 나날이 늘자 '지락원(地樂園)'이라는 아편굴이 하나 더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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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이 작년 입수한 김구의 '백범일지' 친필 서명본.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김구는 혼란한 틈을 타 마루 속에 깔아놓은 벽돌을 창끝으로 들추고 땅속을 파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조덕근, 양봉근, 김백석 등 장기수 4명과 함께 탈옥했다. 감옥 담장을 넘어 "누구든지 내 갈 길을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결단을 내버릴 마음으로 쇠창을 손에 들고 정문인 삼문(三門)으로 바로 나갔다"고 김구는 당시를 회상했다.

옥에서 빠져나온 김구는 '용동 마루터기', '천주교당의 뾰죽집이 보이는 언덕', '화개동 마루터기' 등을 거쳐 서울로 탈출했다.

김구의 탈출 경로를 연구한 몇몇 학자는 김구가 감리서에서 나와 용동 마루터기, 화개동(현 신흥동) 마루터기를 지나 문학동, 만수동, 부평 등지를 거쳐 서울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구는 인천에서 시흥 가는 대로변에 서 있는 방석솔(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 자라는 소나무) 밑에 몸을 숨겨 한나절을 보냈다.

김구가 몸을 숨기다가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목에는 인천대공원이 있고,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와 곽낙원 동상이 서 있다.

'백범일지' 속 김구의 첫 번째 옥살이만으로도 재조명해야 할 인천 이야기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