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고 기술 기록부족 아쉬워

김구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이른바 '치하포 사건'으로 첫 번째 옥살이를 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1898년 인천감리서 감옥에서 탈출했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생생히 기록한 탈옥과정에서 스치듯 언급한 무기 겸 탈출도구가 있는데, 바로 '삼릉창'(三稜槍)이다.
수많은 사람이 '백범일지'를 읽으면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삼릉창. 옛 인천의 대장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인천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김구는 부친에게 대장장이를 통해 한 자 길이(약 30㎝)의 삼릉창 하나를 만들어 몰래 넣어달라고 했다. 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옷 속에 넣어 전달했다.
인천의 대장간에서 제작했을 게 틀림없다. 김구는 이 쇠창으로 벽돌을 들추고 땅을 파서 감옥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탈출하는 내내 삼릉창을 품에 지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을 것이다.
이 삼릉창 하나에 목숨을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구의 아버지는 삼릉창을 인천의 어느 대장간에 맡겼을까. 인천은 근대문물이 한국에 전파되는 최일선이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인천 개항장의 대장간에서는 다국적 물품의 주문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천의 대장간 기술력이 전국 최고 수준이었을 테지만, 현재 그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1936년 판 인천상공인명록'을 근거로 2009년 펴낸 '식민지 시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를 보면, 당시 인천에는 대장간 9곳이 있었다. 일본인 소유가 5곳이고 조선인 소유가 4곳이었는데, 조선인이 운영하던 대장간의 영업세액이 가장 높았다.
그만큼 조선인과 일본인 간 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태범(1912~2001) 박사가 1983년 쓴 '인천 한 세기'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애관극장 아래 있던 최씨대장간은 도끼, 칼, 호미, 낫 등을 만드는 솜씨가 남달랐다고 한다.
인천에서 만든 삼릉창이 어떠한 형태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희박하다. 조선 후기 군사교범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그림으로 소개됐지만, 중국 병법서를 그대로 베낀 중국식 창이다.
그 삼릉창을 백범도 알고, 대장장이도 알았다. '백범일지'에서 삼릉창의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인천에서 만들어져 백범을 탈출시킨 그 삼릉창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도 커진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