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대 옥살이때 객주 박영문·안호연 강화 유지 김주경등 '큰 도움'
1946년 4월 '38도선 이남지방 순시' 첫 일정 인천찾아 "감개무량" 밝혀
기념사진 남긴 강화 '1928가옥' 홍익인간 친필휘호 걸려있는 합일초교
어머니 동상등 곳곳에 김구 '유산'… 가치 더할 이야기 계속 발굴해야

인천 시절을 쓴 문장마다 그 당시 만났던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묻어난다.
객주 박영문과 안호연, 강화의 김주경처럼 김구의 인천 감옥살이를 도왔던 이들이나 민족운동가 유완무는 '백범일지'가 아니었다면 잊혀질 뻔한 인물이자 귀중한 이야기다.
김구는 1946년 4월 '38도선 이남 지방 순시'의 첫 일정으로 이틀 동안 인천을 찾았다.
20대 초반과 30대 후반에 두 번이나 인천 감옥에 갇혔던 김구의 남다른 감회는 '백범일지'에서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는 구절로 드러난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5일자 톱기사를 포함해 3일에 걸쳐 김구의 인천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김구는 4월 14일 오전 인천 내리교회를 찾아 45분 동안 인천에서의 감옥생활을 술회했다.

투옥 당시는 이름을 달리 썼기 때문인지, 김구의 두 차례 인천 옥살이는 이때서야 널리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는 1946년 4월 17일자 기사에서 48년 전 청년 살인강도범 '김창수(金昌洙)'와 33년 전 총독 암살미수범 '김귀(金龜)'가 김구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김구 선생이 인천을 내방하였을 때 비로소 판명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백범일지'는 인천 방문 이듬해인 1947년 12월 출간됐다.
대중일보 4월 15일자 톱기사를 보면, 김구는 내리교회에서 인천 감옥살이를 이야기할 때 "여러 지사들은 나의 양친을 찾아보고 위로도 하고 원조도 하였었고, 또 당시 인천에는 박영근(박영문의 오자로 보임), 안호연이란 분의 집에 나의 자친께서 식모 노릇을 하여 가시면서 하루에 밥 두끼씩을 받아 옥중의 나를 살려오시느라 악전고투하셨던 것"이라며 자신을 도운 지역 인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개성 출신 인천항 물상객주 박영문은 개항기 조선인 상권수호활동에 앞장선 단체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의 일원이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는 박영문의 집에서 동자꾼(식모)을 하면서 아들 옥바라지를 했다.
김구가 박영문을 은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의 일자리 이외에도 여러모로 도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또 다른 인천의 객주 안호연에게도 여러 차례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다음은 김구가 1911년 '안악사건'(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14년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쇠사슬을 매고 인천항 축항공사장에서 노역할 당시를 회고한 '백범일지' 내용이다.
'감옥문 밖으로 축항공사장을 출입할 때 왼편 첫 집이 박영문의 물상객주 집이다. 17년 전에 부모 양위께서 그 집에 계실 때, 박씨가 후덕한 사람인데다 나를 사랑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중략) 왼쪽 맞은편 집도 역시 물상객주 안호연의 집인데, 안씨 역시 나와 부모님께 극진한 정성을 다하던 노인으로, 그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출입시 종종 마음으로 절하고 지냈다'.
객주는 전국의 상품 집산지에서 물건을 맡아 팔거나 매매를 주선하고, 화물 보관·운송, 숙박업, 금융 서비스까지 제공한 중간상인이다.
김구가 첫 옥살이를 할 때 인천 개항장은 일본, 중국,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인천항 객주들은 일본인 등 외국 상인으로부터 지역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1885년 인천객주상회(仁川客主商會)를 조직했고, 이후 인천신상협회로 전환했다.
이들은 일본제일은행이 인천과 부산을 중심으로 조선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 화폐를 유통하자 '수취 거부 운동'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인천 객주들은 사상적으로 고종을 지지하고 보위하는 '근왕파'이거나 '친러시아파'였다.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인을 처단한 청년 김구 행동에 대해 객주들이 관심을 갖고 지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가 사형 집행을 간신히 피한 직후 감리서의 한 주사는 "오늘 전 항구의 객주 32명이 긴급회의를 하고 통지문 돌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며 객주들이 김구를 살리기 위한 돈을 모금하려 했다고 전했다.
백범은 유난히도 강화와 인연이 깊다. 강화 출신 김주경도 적극적으로 김구를 옥에서 빼내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쳤다.
김주경은 강화 관아에서 일하다가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이 3천명 규모의 군대인 진무영을 설치했을 때 군수품 창고지기를 했다고 한다.
투전으로 수십만냥을 벌었다거나 자경단을 운영하며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나 도적 등을 "혼내줬다"는 얘기가 '백범일지'에 나온다.
'백범일지' 정도에서만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김주경은 김구의 부모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고, 조정에 김구의 방면을 탄원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재산마저 탕진했다. 조정의 관료들에게 어마어마한 뇌물을 받쳤던 듯하다. 하지만 백범이 풀려나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부패한 관료들이 뇌물만 받고 약속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대목이다. 미결수 신분에서 도저히 석방될 방법이 없자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내용의 시를 보낸 것도 김주경이다.
김구는 1898년 3월 탈옥 이후 전국을 떠돌다가 고향 해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1900년 2월 다시 김주경을 찾아 강화도로 떠났다.
하지만 김주경의 행방은 묘연했고, 동생 김진경을 만나 그의 집에서 3개월 동안 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강화에서 자신이 김창수임을 숨겼던 김구는 김진경으로부터 "유완무라는 사람이 김창수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유완무는 인천 감옥의 김구를 구출하기 위해 '13명의 모험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고 김창수를 구출하자는 계획'이었다. 김구가 먼저 탈옥했기 때문에 유완무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김구는 자신이 바로 그 김창수라는 사실을 김진경에게 밝히고 강화를 떠나 서울에서 유완무를 만났다.
유완무와 함께하는 몇몇 인물들을 거치며 일종의 '비밀결사'에 참여하게 됐다. 유완무는 이때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金龜)라고 고쳐줬다.
다시 김구는 유완무의 제자인 주윤호가 사는 강화 장곶에 머물다가, 주윤호가 준 백동전 4천냥을 '온몸에 돌려 감고 서울로 왔다'가 고향으로 갔다.
김구는 학식이 아직 부족해 서울에서 유학하고, 김구의 부모에게 집과 논밭을 제공해 생활할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게 유완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1901년 초 김구의 부친상으로 흐지부지됐다. 부평부 시천리(현 서구 시천동) 명문가 출신 유완무는 많은 애국지사가 그랬듯 국운이 기울자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김구가 해방을 맞아 귀국해 가장 먼저 수소문한 사람은 윤봉길, 이봉창, 김주경의 유가족이었다.
1946년 11월 인천에서 경비선을 타고 무의도를 거쳐 강화를 방문한 김구는 김주경 동생 김진경의 집을 찾아 친척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강화 합일학교(현 합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김구 선생 환영대회'에서 강연을 했다.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1922~2009)은 2009년 펴낸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에서 "백범 선생의 강화행은 김주경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였다"며 "합일학교 강연 도중 선생이 그곳에서 글을 가르칠 때 공부한 사람을 찾았더니 어떤 나이 든 노인이 자기가 그때 배웠노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합일초등학교 교장실에는 당시 김구가 쓴 '弘益人間'(홍익인간)이란 휘호가 걸려있기도 하다.
1938년 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인한 수전증이 만드는 특유의 '떨림체'가 단번에 백범의 글씨임을 알아볼 수 있다.
김구가 강화지역 유지들과 사진을 찍은 이른바 '1928가옥'(황씨고택)도 강화읍에 남아 있다. 인천에서 옥바라지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은 전국에서 인천밖에 없다.
인천대공원에 있는 곽낙원 여사 동상은 김구가 어머니 모습을 닮도록 만들고자 직접 제작과정에 참여했으나, 서거 두 달 뒤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인천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김구와 관련해 인천에 남은 유산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입혀야 할 것은 역시 '사람 이야기'다. 사람 이야기를 계속 찾아야 김구와 인천의 인연이 더욱 풍성하고 깊어질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