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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인천 감옥에 갇히자 모친 곽낙원 여사 황해도서 전 재산 팔고와 '옥바라지'
父 김순영도 객주집 더부살이하며 '구명운동' 김구 탈옥위한 삼릉창 전달하기도
자식대신 '옥고' 석방 이듬해 숨져… 곽 여사 가장으로서 독립운동 물심양면 지원
中 망명생활중 사망 '임시정부의 어머니'라 불려… 공훈 기려 1992년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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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와 인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의 부모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인천에서 옥살이를 할 때 고향을 떠나 옥바라지를 하며 아들이 청년 김창수에서 김구로 다시 태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김구가 감옥에서 탈출한 후 1년간 대신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 말이 딱 백범의 부모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한다. 

 

백범이 민족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애국장이 추서된 곽낙원 여사의 경우는 단지 '백범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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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백범 김구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입비 제막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출처/백범김구전집

김구의 부모는 김구와 관련한 주요 사건 때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할 때 잠깐 잠깐 등장할 뿐 인천에서 온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많지 않다. 

 

비록 인천에 머문 기간이 짧고 황해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인천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김구가 말한 '의미심장한 역사지대' 인천의 인물로도 손색이 없다.

백범 김구는 1876년(고종 13년) 황해도 해주의 텃골이라는 마을에서 김순영과 곽낙원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일지에 나왔듯이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명망 높은 안동 김씨 집안이었지만 1651년 이 가문의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족의 위기에 놓이자 집안 전체가 황해도로 도망을 쳤다. 

 

이때부터 평민 행색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김순영·곽낙원 부부와 인천의 인연은 아들 김구가 1896년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옥에 갇히면서다. 김구는 처음에 해주의 감옥에 갇혔다가 이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내가 인천으로 이감된 이유는 갑오경장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구의 부모는 전 재산을 팔아 인천으로 동행해 옥바라지를 했다. 형편상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먼저 아들을 따랐다. 해주에서 나진포까지 걸어갔다가 배를 타고 강화를 거쳐 인천항으로 가는 고된 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 도착한 곽 여사는 아들의 밥 동냥을 할 궁리로 인천의 한 물상객주를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며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 테니 아들에게 하루 세끼 밥 한 그릇씩 가져다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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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찍은 백범 김구 가족 사진. 왼쪽부터 맏아들 김인, 김구, 둘째아들 김신. 앉아있는 사람이 어머니 곽낙원여사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이때부터 곽 여사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옥바라지에 나섰다. 

 

그때의 감옥제도는 죄수들에게 먹을 것을 규칙적으로 배급하는 게 아니라 죄수들이 일을 해 짚신이라도 삼으면 간수가 길거리에 내다 팔아 얻은 곡식으로 죽을 쑤어먹는 식이었다.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 김구는 동료 죄수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지금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있는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바가지를 옆에 끼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짚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옥바라지를 했던 바로 그때의 모습이다. 김구가 생전에 직접 고증했고, 조각가 박승구가 빚어냈다.

아버지 김순영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인천으로 뒤따라와 객주의 집에 더부살이하며 옥바라지를 도왔다. 

 

인천 감옥에 유교 경전 중 하나인 대학(大學)을 넣어 김구가 옥중에서라도 학문에 소홀함이 없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부인과 함께 인천감리서에 아들의 석방을 위해 소장(訴狀)을 수차례 보냈다. 

 

강화의 부호 김주경의 도움으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법부대신 등을 상대로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구의 탈옥은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김구는 1898년 탈옥을 결심하고 모서리가 3개인 '삼릉창'을 만들어달라고 아버지 김순영에게 부탁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아버님도 무슨 일을 꾸미는 줄 짐작하시고 즉시 삼릉형으로 만든 쇠창 하나를 의복 속에 넣어주셨다"고 했다. 

 

탈옥의 발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아버지는 김구의 결연한 의지를 믿고 인천의 대장장이에게 삼릉창 제작을 맡겼을 게다. 훗날 자신에게 책임이 떨어질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김순영은 아들 대신 인천의 감옥에서 1년 동안 대신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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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김구의 아내 최준례의 묘비에서 찍은 사진. 중절모를 쓴 남성이 김구, 오른쪽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다. 비문은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이 썼는데 숫자를 자음 순서대로 치환해 표기했다. '1'이 'ㄱ', '2'가 'ㄴ'인 방식으로 "4222해 3달 19날 남, 대한민국6해 1달 1날 죽음"으로 해석된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김구는 어렸을 적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버지 김순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순영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를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이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했다고 한다. 음주가 한량이 없어 취하면 양반을 만나는 대로 때려 여러 번 관아에 구속되기도 했다. 

 

김구는 아버지에 대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고 했다. 

 

김순영은 김구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직접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오기도 했다. 김구가 과거에 낙방하고 동학에 심취했을 때 함께 동학의 길에 뛰어들기도 했다.

김구의 부모는 아들이 인천 감옥을 탈출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만 인천을 떠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뒤따라온 인천 순검에 체포됐다. 부부는 인천 감옥에 갇혀 갖은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곽낙원 여사는 곧 석방됐고, 아버지 김순영이 아들 김구 대신 구속돼 1898년 3월부터 1년 동안 인천에서 옥살이를 했다. 

 

김구는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가 2년여 뒤 도피처에서 만난 스님을 통해 부모님이 감옥에서 갖은 형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김순영은 인천 감옥에서 석방된 이듬해인 1900년 12월 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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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김구의 둘째아들 김신이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어머니 최준례의 유해를 인천항으로 봉환하는 장면. 출처/백범김구전집

김구가 도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터여서 다행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김순영은 열나흘 동안이나 아들의 무릎을 베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김구는 이때 왼쪽 허벅지 살 한조각을 베어내 불에 구워 아버지에게 약이라 속이고 먹이고, 흐르는 피를 마시게 했다.

남편을 여읜 곽낙원 여사는 그때부터 가장으로서 아들 김구의 애국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11년 7월 신민회 사건으로 김구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도 눈물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이며 아들을 응원했다. 김구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고향에 남았던 곽낙원 여사는 1922년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곽낙원 여사가 인천과 다시 인연을 맺은 때는 아들에 부담 주기 싫다며 1925년 말 손자를 데리고 귀국하면서다. 그 전해 며느리 최준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자 선택한 일이었다. 

 

며느리가 출산한 뒤 몸이 성치 않았을 때였는데 시어머니에게 부탁하기 어려워 2층에서 아래층으로 세숫물을 들고 내려가다가 실족했다가 후유증을 얻어 그만 죽고 말았다. 

 

어린 손주를 키우던 곽 여사는 채소 가게 쓰레기통에서 버린 배추 껍데기를 주워다 소금에 절여 먹고, 항아리를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지자 네 살 짜리 손주를 데리고 고국행을 택했다.

동지들의 도움으로 인천항으로 갈 뱃삯은 마련했으나 도착해서가 문제였다. 

 

곽 여사는 무작정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인천지국은 상하이 특파원의 소식을 듣고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다며 고향에 갈 여비를 챙겨줬다. 

 

실제 1925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는 "죽어도 고국강산,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객창(上海客窓) 김구씨 모친"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로 곽 여사가 며느리의 죽음과 생활고로 인해 고국행을 결심했으나 형편이 암담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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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직후 완성된 곽낙원 여사의 동상. 사진 왼쪽부터 동상을 만든 조각가 박승구,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과 그의 부인 임윤연, 백범의 측근 김덕은이다. 이 동상은 경교장에 있다가 1997년 인천대공원에 세운 백범 김구의 동상 옆으로 이전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당시 동아일보 인천지국은 문화·체육활동을 통해 인천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에 열중했다.

 

초대 지국장 하상훈은 내리교회 엡윗청년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고전 국악 연구단체 이우구락부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근거지로 했다. 각종 음악회와 토론회, 웅변대회를 열어 애국계몽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곽 여사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생활비를 모아 중국에 있는 김구에 송금하고 구국 기도회에 참석해 독립을 염원했다. 

 

그러다 1934년 김구의 설득으로 다시 중국으로 갔다. 당시 나이 76세였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에게 "이제부터는 너라고 하지 않고 자네라고 하겠네"라고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또 아들과 청년회 동지들이 팔순 잔치 때 전달한 돈으로 권총을 사서 돌려주기도 했다. 

 

그가 단지 백범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곽 여사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 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면서 김구와 고락을 같이하다가 병을 얻어, 1939년 4월 26일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곽 여사는 중국에 안장됐다가 광복 후인 1948년 김구가 고국으로 모셨다. 백범 50주기를 맞은 199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