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출신 홍진, 의병사건 처리에 '회의' 검사 접고 '만세운동'
임정수립 주도 헌법 결정등 '역사적 태동 장소'로 인천 선택
日 감시 피하려 '서울밖', 관교·문학동 선영있는 홍진과의 인연
외국조계 밀집 국제적 상징성등 '만국공원 회의' 해석 '분분'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露領) 임정이라 불리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국내의 한성 임시정부다.
한성 임시정부의 출발점이 바로 인천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지금의 자유공원)의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태동했고, 그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홍진(洪震·1877~1946)이 있었다.
홍진은 조선 말기 1877년 8월 지금의 서울 서소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홍면희(洪冕憙)였는데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꿨다가 다시 '鎭(진압할 진)'을 '震(벼락 진)'으로 바꿨다.
갑오개혁과 제국주의 침탈을 경험한 그는 근대 문물에 관심을 가졌고, 법관의 길을 택했다.
1903년 27세의 나이로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06년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의병 사건을 처리하는 데 회의를 느껴 검사 생활을 청산하고, 1908년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전국을 뒤덮은 1919년 3월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홍진은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규갑과 함께 국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이규갑은 충남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평양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홍진과 연을 맺었다.
홍진과 이규갑은 분산된 만세운동 단체를 하나로 합쳐 임시정부를 수립해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각 지역과 종교계, 학생 대표들을 끌어모아 '비밀독립운동본부'를 만들어 3월 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서울 집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여기서 정부 이름을 '한성 임시정부'라 짓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뽑았다.
이규갑은 그의 회고록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전말'에서 "한성정부를 해외 망명정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임명한 각원들도 전부 그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한성정부 수립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선포하느냐였다. 홍진은 지역의 대표를 소집해 지금의 국회 개념인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어 13도 대표자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해 정부 수립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거사를 치를 장소로 인천 만국공원을 택했다.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이 왜 인천에서 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당시 3·1 운동과 한성 임시정부 관련자의 재판기록(공판시말서)을 보면 당시 일제는 이들이 경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서울을 벗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1919년 11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공판에서 조선총독부 검사는 전남 영암 출신의 재력가이자 한성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이름을 올렸던 한남수에게 "서울에서 집합하면 경찰의 눈에 띄므로 인천에서 집합한다는 말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또 "요릿집에서는 칸막이 너머로 들리니 만국공원에 모이는 것이 비밀이 보장되므로 각 대표자 등을 모아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상의를 하기로 했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회합을 주도한 홍진과 인천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인천에서 회합이 개최됐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다.
홍진은 조선 후기 명문 사대부 집안인 풍산 홍씨로 선영이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있었다. 인천지역 학계에서는 지금의 미추홀구 백학초등학교에서 연경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체육공원과 제2경인고속도로 교각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진은 실제 1946년 숨을 거두기 전 인천 선영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가 1985년 동작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인천개항장연구소 강덕우 소장은 "회합의 장소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의 조계가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고려한 결정으로도 여겨진다"고 했다.
또 "돌이켜보면 인천에 홍진의 선영(先塋)이 있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상해 임정 소식에 中 넘어가 노령등과 3곳 통합 이끌어
임시의정원 의장등 역임 1946년 사망… 1962년 독립장 추서
1984년 국립묘지로 이장 묘비 인천시립박물관 옮겨져
표지석 없어 선영내 무덤 정확한 위치 확인안돼 '아쉬움'
4월 2일 만국공원 회합은 철저한 비밀 회합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손가락을 흰 천이나 종이로 감싼 것을 표식으로 삼았다.
하지만 3·1 운동 직후 어느 때보다 감시가 삼엄했던 터라 20명 내외의 대표가 참석했을 뿐 많은 이가 참여하지는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을 보면 당시 천도교 대표 안상덕, 기독교 대표 박용희·장붕·이규갑·홍면희(홍진)·권혁채, 유림 대표 김규 등이 참석했고 지방대표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13도 대표자회의는 미리 마련한 임시정부 조직안과 헌법을 통과시켰고,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파리강화회의에 나설 인물도 정했다. 13도 대표자 명의로 된 국민대회 취지서와 정부 요인 명단, 선포문 등을 인쇄해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도 짰다.
국민대회는 4월 23일 종로에서 계획대로 열렸지만 이를 주도한 홍진은 정작 참석하지 못했다.
홍진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상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다는 소식을 듣고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4월 중순 중국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홍진은 일제가 한성 임시정부 가담자를 잡아들였을 때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검사가 한남수 등 가담자에게 홍진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관계를 캐물은 공판 기록은 홍진이 한성 임시정부에서 차지한 위상을 짐작케 했다.
성냥갑에 각료 명단을 숨겨 압록강을 건넜던 그 무렵 홍면희라는 이름을 버리고 '홍진'으로 개명했다. 홍진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였다.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한성정부를 인정할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고, 홍진은 밀정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홍진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위해 애썼다. 상해와 노령 임시정부가 서로 근거지를 어디로 둘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빚을 때 한성 임시정부의 존재가 비로소 부각됐다.
상해 임시정부가 한성을 중심으로 통합하자고 제안했고, 노령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3개의 임시정부가 하나가 된 것이다. 1919년 9월 6일 임시의정원(지금의 국회)에 제출된 통합안과 새 헌법이 통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이후 홍진은 임시의정원에서 3번의 의장을 역임했고, 내부 갈등을 빚고 있던 상해와 노령 출신들의 좌우 합작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2021년 11월 극동 지역 군비 축소를 논의하는 워싱턴 태평양 회의에 참가하는 열강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25년에는 4대 국무령으로 부임해 임시정부를 이끌기도 했다.
좌우 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고, 해외 독립단체들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광복군 편성 추진에 기여했다.
홍진은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2차 환국 때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 그는 민족의 자주성 수호를 위해 반탁을 지지했고, 반탁운동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돼 건국 사업에 투신했다.
그러다 1946년 9월 9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진의 영결식은 9월 13일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이승만, 김구를 비롯한 당대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영결식이 끝난 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인천 선영에 안치됐다.
대중일보와 동아일보 9월 14일자 신문은 홍진의 장례 소식을 이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1962년 홍진에게 독립장을 추서했다.
홍진의 무덤에는 묘비가 함께 세워졌는데 1984년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될 때 인천시립박물관 측이 유가족의 허락을 얻어 당시 중구 송학동에 있던 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왔다.
당시 박물관이 자유공원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만국공원 회합의 주인공인 홍진의 묘비를 놓기에는 가장 제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이 묘비를 이전하면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을 남겨놓지 않아 지금으로선 홍진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시립박물관은 1990년 옥련동으로 이전한 뒤 홍진의 묘비를 수장고에 보관해 오다 올해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했다. 그리고 박물관 2층 작은 전시실에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라는 주제의 홍진 특별전을 만국공원 회합이 있던 날인 4월 2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연다.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유물관리부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한성정부의 수립과 그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전시를 열었다"며 "홍진의 묘비는 가끔 야외 전시를 하기도 했으나 보존 문제로 수장고에 보관하다가 100주년을 맞아 전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홍진의 무덤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