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살부터 잠두교회 다니며 계몽운동 접해…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던 1919년 3월
'의병활약' 유봉진등 기독교인들 주도 강화 읍내서 펼쳐진 1만여명 '만세운동' 동참
시위 공모·소식지 배포로 체포 6개월뒤 무죄로 풀려나… 옥고때 '민족의식' 강해져
자서전격 연재 글 "감옥에서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애국심 불타게 됐다" 밝혀

강화 읍내에서만 하루 동안 1만여명이 모인 강화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따져도 대규모 시위였다. 강화에서 나고 자란 죽산 조봉암(1899~1959)도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평범한 대서소(代書所) 보조원이었던 21세 청년 조봉암은 강화 만세운동으로 인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청년 시절 강화에서의 경험이 죽산을 독립운동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조봉암이 강화에서 태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꼭 60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조봉암은 2011년 복권될 때까지 50년 넘게 출생지조차 잊혀 있었다.
현재까지도 그의 출생지는 확정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2013년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출생지로 창녕 조씨 집성촌이었던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남산대 또는 금월리 가지마을 촌락이 가장 신뢰할 만한 추정이라고 했다.

조봉암이 9살 되던 해인 1907년 8월 강화에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한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는 의병이 봉기했다.
죽산이 강화 의병운동을 언급한 기록은 없지만, 잠시나마 강화성까지 점령했던 의병의 인상이 어린 시절 강하게 남았을 수밖에 없다.
4년제 강화공립보통학교와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조봉암은 강화군청에서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1916년 18세에 강화군청 보조직원인 고원(雇員)이 되어 토지조사사업 통계작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 조봉암은 주산(珠算)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10살부터 다닌 신문리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는 조봉암의 일생에서 첫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진위대장 사직 후 잠두교회 교인이 되면서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 잠두교회 신도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조봉암은 군청 일을 그만두고 잠두교회 엡윗청년회(감리교 청년봉사단체) 일을 열심히 도왔다.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91) 여사를 낳은 김이옥(1905~1933)도 잠두교회를 같이 다니며 인연을 맺었다.
1918년 봄, 조봉암은 관청리 대서소 보조업자로 취직했다. 1년 후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강화 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그 중심에는 길직교회 권사 유봉진(1886~1956)이 있었다. 그는 15세부터 18세까지 강화진위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군대 해산 당시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해 갑곶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화 출신 황도문(1897~1950)은 3·1운동에 참여한 직후인 3월 5일 귀향해 유봉진에게 서울의 시위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유봉진은 황도문, 염성오(1877~1947), 유희철(1893~1942) 등과 시위계획을 논의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을 보면, 3월 9일 길직리 교회당에서 길직교회와 잠두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회합했고, 이 자리에서 조종환(1890~1937)은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연설하며 "강화도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다"라고 주민들에게 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강화군민에게'라는 문서를 곳곳에 배포했다.

3월 18일 오후 2시께 강화 읍내 장터에서 유봉진을 비롯한 만세시위 기획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줬고, 만세시위에 합세한 군중이 순식간에 불어나 장터를 순찰 중이던 순사조차 막지 못했다.
유봉진은 '결사대장'이라고 쓴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길상면 온수리에서 백마를 타고 읍내 장터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장터에 있는 종루에 올라 종을 치며 시위대의 용기를 북돋웠다.
강화경찰서는 순사보 8명을 파견했으나, 만세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 오히려 군중은 순사들에게 "같이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요구했다. 유봉진은 강화군수 이봉종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종용했고, 강화군수도 결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강화 주민들은 밤 11시가 돼서야 해산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날 강화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민은 1만명에서 시작해 최대 2만명에 달했다는 일본 군경 보고자료들이 있다.
이후에도 강화 만세운동은 부내면 월곶리, 송해면, 양사면, 선원면, 삼산면 등 강화도 본도뿐 아니라 교동도, 석모도 등지로 들불처럼 번지며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특히 1919년 4월 7일 석모도 만세운동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적발돼 석모도로 유배된 이민 2세대 이안득(1900~?)이 주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유봉진은 만세시위 직후 고려산에 숨어있다가 북도면 장봉도를 거쳐 마니산에 은신했는데, 일본 경찰이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됐다.
그는 1920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강화 만세시위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45명이다. 이 가운데 38명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유봉진의 '애기패'를 자처하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다음은 조봉암이 유봉진에 관해 쓴 '내가 걸어온 길'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 강화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봉진씨의 영도 하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방곡곡 어느 작은 부락 하나도 빼지 않고 일어났었고 그것이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됐었다. 그런데 유 선생의 지도방침은 철저한 평화적 시위였기 때문에 수천 명이 태형을 당했을 뿐,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비교적 많지 않았었다. 유 선생은 마니산 꼭대기에 숨어서 만세운동을 지휘했고, 왜놈에게 체포되어서도 '독립운동자 유봉진'이라고 종이에 크게 써서 가슴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말 한마디 대꾸도 안 했다. 유 선생은 5년 징역살이를 했고 우리 애기패들은 1년 살았다."
강화 만세운동 전후로 조봉암은 보통학교 동창인 조구원(1897~1928), 고제몽, 오영섭, 구연준, 김한영, 김영희, 주창일 등 청년층 지도자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지하활동을 펼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예수교도 8인조 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기독교학교 교사이던 조구원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의 1919년 9월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을 보면, 조봉암과 동지 7명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조구원은 1919년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경감) 이해용 앞으로 "조선독립운동에 찬동하는 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목을 베어 죽이거나 방화할 것이다"라고 적은 문서를 보낸 혐의를 받았다.
고제몽은 잡화상 유진식에게 "조선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그 기운을 왕성하게 하기 위해 점포를 폐쇄하라"는 문서를 보냈고, 오영섭은 강화경찰서의 일본인 순사부장(紀喜義安)에게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할 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문서를 보내 경고했다.
조구원과 고제몽은 태형 90대, 오영섭은 태형 60대를 선고받았다.
조봉암을 비롯한 나머지 5명은 3월 20일께 조선독립운동을 공모한 후 전국 3·1운동 소식지인 '자유민보' 등 십수 종의 불온문서를 작성해 강화 읍내에 배포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화 청년들이 섬 곳곳으로 퍼뜨린 독립선언서와 자유민보 등은 만세시위의 불씨를 살리는 데에 일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비밀결사 8명 가운데 조구원이 유일하다.
1919년 4월 중순에 구속된 조봉암은 9월 30일까지 6개월 가까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시때때로 고문을 당했지만,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내가 걸어온 길'에서 "옥중에서는 가끔 만세소동이 있었다"며 "나도 그 사건에 가끔 걸려들어서 매여달리기도 하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하루는 또,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고 문짝을 발길로 차고 날뛰다가 또 붙잡혀 나갔다. 나는 붙잡혀 나가면서도 기를 쓰고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또 죽산은 "진심으로 말하면, 3·1운동이 터지고 내가 잡혀서 감옥으로 갈 때까지는 국가와 민족이 어떻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일본 놈이 우리 조선사람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데 대한 불만과 불평이 있었던 청년일 따름이었다"며 "그러나 감옥에 들어가서부터 비로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았다. 세상에 대한 눈이 떠졌고 애국심이 불타게 됐다.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운 애국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고 '내가 걸어온 길'에 썼다.
강화 만세운동의 경험이 청년 조봉암을 죽산 조봉암으로 진보하게 만든 셈이다.
조봉암은 출옥한 직후인 1920년 1월, 22세의 나이로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다. 같은 해 5월 의친왕 망명을 추진한 '대동단사건'으로 평양경찰서로 연행돼 2주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듬해 7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론을 접했다. 이후 조봉암은 해방이 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