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2017년 7월 31일 서울 망우리공원 죽산 묘역에서 열린 조봉암의 58주기 추도식장에 처음으로 '대통령 화환'이 왔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60주기 추도식까지 3년째 화환을 보내고 있다.

1921년 일본 유학중 공산주의자 교류 '제국주의 반대' 독립운동 최선의 방편으로 선택
조선공산당 창단 참여 코민테른 연락책 활동 中서 독립당 조직하다 체포 '6년 옥살이'
인천 정착후 또 '구속' 감옥서 해방맞아… 전향 선포 제헌 국회의원·농림부 장관등 역임
신뢰성 논란 '친일흔적' 보도에 서훈 보류 "불확실한 기사 1건보다 커다란 업적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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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해방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동지였던 박헌영(1900~1955 추정)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갈라서면서 해방 이후 사상적 전향을 선포하고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죽산이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는 뚜렷하다. 그는 평화통일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1921년 7월 일본 유학을 떠나 김찬(1894~?)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조봉암은 이들과 엿장수를 하면서 어렵게 학비를 벌었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주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

1년 만에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조봉암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나섰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논객으로 급부상하면서 1922년 11월 소련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한인 공산주의자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12월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호출을 받아 조선인 공산당원 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기도 했다.

이후 조봉암은 김찬, 박헌영, 김단야(1901∼1938), 임원근(1900∼1963) 등 청년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인천을 비롯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도 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조봉암은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를 누비며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간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상하이를 기반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운동에 뛰어들고, 현지 한인들의 사회주의계열 단체를 결성해 이끌었다.

조봉암은 항일투쟁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택했다. 당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일본의 조선 침탈을 묵인하는 국제 정세에서 조선인들의 정당 조직활동이나 빨치산(partisan) 투쟁에 금전적인 지원을 한 것은 국제공산당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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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조봉암을 다룬 동아일보 1933년 2월 25일자 신문기사. 기사 속 사진은 조사를 받을 당시 조봉암.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민족주의계열과 더불어 사회주의계열이 독립운동의 주요 흐름을 차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조봉암은 1957년 월간지 '희망' 2·3·5월호에 연재한 자서전 격인 '내가 걸어온 길'에서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볼셰비키들은 국내에서 혁명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했고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반대하고 한국 독립을 적극적으로 원조한다는 것이며, 그 실증으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독립 원조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국내에 보냈다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그때야 비로소 소비에트 혁명의 내막을 약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싸워서 이기자면 우리 자신이 굳은 조직을 가져야 되겠고, 러시아와 협력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야 되겠다고 작정했다."

조봉암은 1932년 9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체포돼 인천항을 통해 입국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동아일보는 1932년 10월 1일자 신문에서 '제1차 공산당 간부 조봉암 작일 피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죽산의 체포 소식을 다루면서 "조봉암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있던 사람인데, 조선에 있을 때는 신흥청년동맹과 화요회 등에서 중요 간부로 활동하였다"고 설명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당시 상황이 언급됐다.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나이 삼십 남짓해 보이는 중국복 입은 청년이 내 앞으로 다가서며 중국어로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하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뱃불을 내어 주었더니 그 자는 담뱃불을 붙이는 체하면서 내 손을 슬금슬금 훔쳐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그냥 무심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난데없이 일본말로 '고꼬다요'(여기야)하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면을 둘러보니 벌써 일본 놈 서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전후좌우에 양복 입고, 사진기를 어깨에 둘러멘 놈들이 내 편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중략) 벌써 수십 명 왜놈 가운데 둘러싸여 있었고 불란서 형사 한 명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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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전 법정에서의 모습.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 살인'을 당한 죽산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경인일보DB

치안유지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은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감옥에서 6년을 보내고 1939년 7월 출소했다. 일본 황태자 탄생에 따른 은사(恩赦)조치로 1년이 감형됐다.

조봉암은 출소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강화 출신 김이옥(1905~1933) 여사와 상하이에서 함께 살 때 낳은 어린 딸이 인천에 있는 먼 친척에게 맡겨져 있었다. 

 

앞서 김이옥 모녀는 1933년 5월 귀국해 강화 친정에서 지냈는데, 그해 10월 김이옥은 지병이 악화해 세상을 떴다. 

 

당시 인천 금곡동과 창영동 쪽에는 창녕 조씨 집안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또 조봉암이 서울에서 YMCA 중학부에 다닐 때 그를 따랐던 박남칠(1902~1950)이 인천 미곡상조합 조합장으로 지역 상공업계의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미곡상과 객주업을 한 김용규 등 '강화구락부' 출신 지역 유지들도 조봉암에게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인천상공회의소 간부이자 지역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이었다.

죽산의 후원자들은 인천 소화정(부평구 부평동)에 집을 얻어줬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인천비강업조합을 설립해 넘겨줬다. 

 

비강업은 정미소에서 벼를 찧을 때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료로 공급하는 업종이다.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시장 건어물거리 쪽에 있었는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다시피 조봉암을 감시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본은 조봉암에게 전향하라고 끊임없이 회유하고 있었다. 1942년에는 현 중구 도원동에 있는 부영(府營)주택으로 이사했다. 인천부(仁川府)가 1940년 직접 지어 분양한 도원동 부영주택은 지금까지도 일부가 남아있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인천 시절 죽산은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1901~1945), 권평근(1900~1945), 이승엽(1905~1953) 등 좌익계열 인사들의 사상적인 지주로서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1945년 1월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또다시 용산 헌병사령부에 갇혔다. '외국과 통신했다'는 이유였다. 그해 8월 15일 죽산은 헌병사령부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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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신문에는 조봉암이 국방성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친일 흔적으로 보기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해방 전 인천에 살던 시기에 친일의 흔적이 있다며 죽산에 대한 서훈을 보류하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의 흔적이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1940년 신년광고 1건과 1941년 연말의 기사 1건이다. 

 

매일신보 1940년 1월 5일자 신문에는 '흥아신춘'(興亞新春)이라는 신년광고에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3일자 기사에서는 '인천부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해군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듣고 감격하여 지난 20일 휼병금으로 금150원을 인천서를 통하여 수속하였고'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 작가는 해당 광고와 기사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1933~1934년 인천상공회의소 편람에는 매일신보 신년광고에 등장한 '성관사'라는 업체가 없고, 동업자로 이름을 올린 방원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죽산의 서훈과 관련한 결정적인 논란은 국방헌금 150원이다. 우선 조봉암은 서경정(현 중구 내동)에 산 적이 없고, 기사가 보도될 당시에는 부평에 살고 있었다. 

 

이원규 작가는 일본자료 등을 바탕으로 당시 1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4천만원의 가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봉암이 비강업조합을 맡고 있었지만, 국방헌금을 150원이나 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숭의동에 살았던 조봉암의 처남 김영순씨는 이원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150원은 커녕 10원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죽산이 1952년 7월께 그의 죽마고우이자 독립유공자이기도 한 조광원(1897~1972)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강업조합장 자리가 감옥살이보다 힘들었다"며 "걸핏하면 헌금 내라고 시달렸는데, 주변에서 알아서 해줬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도원동 부영 주택
조봉암 가족이 1942년부터 해방 이후인 1948년까지 살았던 인천 중구 도원동 부영주택. 현재 대부분 헐리고 일부만 남았다. /경인일보DB

무엇보다도 죽산이 친일을 했다면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체포돼 8월 15일까지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게 연구자들 시각이다. 

 

죽산이 헌병사령부로 끌려갈 때 부인 김조이(1904~ ?) 여사는 "전쟁에 불리해지니까 말 안 듣는 사람들을 끌어다 죽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처남 김영순씨가 증언했다. 

 

죽산이 풀려난 8월 15일 도원동 부영주택으로 올라가는 언덕이 1천명 이상의 환영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조봉암이 친일이었다면 환영이 아닌 민중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죽산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들을 주축으로 인천보안대를 결성하고,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더군다나 해방 이후 박헌영 등이 조봉암을 축출하려고 맹공을 퍼부을 때도 매일신보의 국방헌금 기사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이 국방헌금을 냈다면 일본의 선전 도구가 되어 신문에 크게 실리고 강연회에 불려다녔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이 가득한 1건의 기사 내용보다는 죽산이 남긴 커다란 업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