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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5월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제막식에 당시 한국광복회 부회장이었던 김유길 선생이 참석했다. 김 선생은 과거 제2지대에 편성돼 한미연합 국내 진공작전에 대비한 훈련을 진행했다. /김유길 선생 측 제공

1919년 태어나… 일본군 탈출 충칭 임시정부 향해 '6천리 장정길'
美OSS와 연일 고강도 훈련 소화… '뜻밖의 日 항복' 생생히 기억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군가 후렴 노병의 인생역정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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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웃나라인 일본과의 관계가 최악의 국면을 맞은 요즘이다.

갈등을 넘어 이제는 경제전쟁으로까지 치닫는 양상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맞물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교과서나 책을 통해, 또 어른들의 입을 통해 과거 일제시대의 참상을 간접 경험한 젊은 세대 역시 최근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막연했던 반감을 직접적인 분노로 전환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잊어선 안 된다는 교훈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통렬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몸소 겪은 이들은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3·1만세운동이 열린 1919년에 태어나 독립운동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한국광복군 출신 김유길(100) 선생을 만나기 위해 제74주년 광복절을 일주일 앞둔 지난 8일 군포시 당동에 위치한 그의 집을 찾았다.

# 학병 출신 마지막 광복군


선생과의 만남을 앞두고 과거 타 매체 인터뷰 영상을 비롯해 각종 역사적 문헌과 기록 등 자료 수집에 매진하며 질문을 구상했다.

그는 일제시대 강제로 중국 내 일본군 부대에 끌려갔지만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 이후 한국광복군에 편성돼 독립운동에 매진한 학병(學兵) 출신 중 한 명이다.

고(故) 장준하·김준엽 선생 등이 그처럼 일본군을 탈출해 6천리 장정길을 함께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표적인 인물이다.

과거 장준하기념사업회의 장정 프로그램 참가할 기회가 있어 학병들의 6천리 장정길을 따라가 본 적이 있었기에, 학병 출신 광복군으로는 유일한 생존자인 선생과의 만남은 큰 기대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와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올해 나이 만 100세. 평소 건강관리를 잘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세월의 무게감까지 견뎌낼 순 없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점보다, 한 세기를 살아온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수많은 장면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점이 안타까웠다. 선생의 기억과 함께 과거 우리 역사의 일부 또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준비한 질문을 쏟아내고 답변을 듣는 식의 인터뷰는 어려웠다.

펜과 수첩을 내려놓고 의자를 바짝 당겨 선생 가까이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 듣듯 천천히 조금씩 대화를 시도했다. 대면 직후 20여분간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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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학병 출신 마지막 한국광복군 김유길 선생이 지난 1979년 과거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집필한 '장정 6천리-한광반 학병 33인의 항일투쟁기' 책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 "충칭을 찾아가는 게 목적이었어"


오랜 침묵을 깬 그의 첫 마디였다. 선생은 일본의 학도지원병이라는 명목 아래 강제징집 대상에 포함돼 1944년 1월 중국 내 일본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5개월만인 6월 30일 같은 부대 소속 김영호와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당시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난다는 일념으로, 그는 목숨을 걸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6천리 대장정에 뛰어들었다.

그는 "돈이 없고 먹질 못해서 (충칭까지 가는 게)보통 일이 아니었다"며 힘들었던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광복군 출신 윤광빈 선생이 지난해 타계한 데 이어 지난 2월 김우전 선생마저 유명을 달리했다.

선생과 같은 학병 출신의 광복군으로 과거 생사의 갈림길을 함께한 동지이자 전우였던 이들이 이젠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들을 떠올리며 선생은 상념에 젖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얼굴 표정만으로 복잡한 심경을 대신 전했다. 그리고는 다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일본을 절대 그냥 보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우리 힘으로 일본을 때려서 사죄를 받아내고 내쫓아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힘을 길러야 했지"라며 광복군에 합류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당시엔 목숨을 내놓겠다는 생각뿐이었어. 나라를 위해선 그럴 수밖에"라며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 그저 물 흘러가듯이… 삶 자체가 그냥 독립운동이었던 것 같아"라고 털어놨다.

후회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김 선생은 "후회한 적 없어. 나라를 위하는 방향으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말했다.

# "완전한 독립을 바랐는데…"


광복군은 미국과 연합한 한반도 침투작전을 통해 일본을 몰아낼 계획이었다.

선생은 광복군 제2지대에 편성돼 미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연일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다.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가물가물했던 그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는 "미국 전략국이랑 같이 특수 훈련을 받는데, 따따띠디 따다 띠띠따… 이렇게 신호가 와. 그러면 그게 ABC가 되는 거거든. 그 암호를 번역하는 일을 했었어"라며 "매일 열심히 훈련을 받는데, 어느 날 갑자기 OSS 요원들이 떠들더라고.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거야. 무조건 항복이라고…"라고 말했다.

선생은 당시 미군과 영어로 대화를 나눈 그 문장 그대로 또렷이 기억해냈다. 하지만 이내 "우리 힘으로 내쫓지 못했으니까 완전한 독립이 아닌 것 같아서… 영 시원치가 않았지"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해방 이후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땅에 돌아온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1남 3녀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생사의 갈림길을 전전하던 중국에서의 험난했던 인생에 지쳤던 걸까. 선생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일반 회사에 다녔고, 자신의 특기인 영어를 살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의 창설을 위해 노력했지만, 직책은 맡지 않았다. 선생의 아내는 나서기를 꺼려 하는 그의 조용한 성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혼한 뒤로도 한동안 남편이 과거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조차 몰랐다는 게 아내의 말이다.

하지만 선생은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광복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국광복회 부회장을 3번,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을 2번 역임하며 애국지사라는 사명감을 토대로 광복군의 의의를 되짚고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국내외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광복군 관련 특강을 펼치며 먼저 떠난 동지들을 대신해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는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렇게 많은 일을 하진 못했어. 노력만 한다고 다 애국지사는 아니니까 좀 쑥스럽고 미안하기도 해"라며 겸연쩍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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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27일 한광반(한국광복군 훈련반) 충칭 출발 기념 사진. /김유길 선생 측 제공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2시간 넘게 이어진 그와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나라'였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우리 땐 진짜 나라를 생각하며 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 어떻게 하는 게 나라를 진짜 위하는 길인지 이런 생각은 크게 안 하는 것 같아"라며 "하기야 우린 전쟁 시절을 살았고 지금은 평화 시대니까 그렇겠지만, 그래도 나라가 소중하다는 건 절대 잊어선 안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 사람들은 확실히 약삭빠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본 사람들이 나쁜 건 아냐"라며 "다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선 분명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특히 정치가 석연치 않아"라고 전했다.

이어 "오로지 자국민들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자기네만 옳다고 하니까. 사과를 할 줄 몰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과나 반성이 없어. 그래서 나쁜 거야"라고 힘줘 말했다.

과거 여러 방송 인터뷰에서 팔동작을 곁들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독립군가를 부르던 그의 모습은 이제 더는 보기 어렵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군가 한 소절을 요청해 봤다.

그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후렴구에 한정되긴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온전한 가사로 불렀다.

군인의 패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가사를 떠올리기 위해 또 음을 정확히 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노병의 모습에는 한 시대의 역사와 함께해 온 그의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선생은 이날 독립군가 후렴구를 서너 차례 반복해 불렀다.

그는 오래전부터 술에 취할 때면 항상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끝까지 부른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노래 도중 흐르는 눈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에서 선생은 노래를 부르는 중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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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

■김유길 선생은?

▲ 1919년 평안남도 평원 출생 

 

일본 오이타 고등상업학교 졸업 

 

▲ 1944년 1월 강제 징집으로 일본군 입대 5개월 뒤 탈출 

 

▲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도착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 편성 

 

▲ 한국광복군 제2지대 소속 한미연합 한반도 침투작전 훈련 수료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수여 

 

▲ 한국광복회 부회장,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역임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백범 김구 등의 주도 아래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군대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일무력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됐으며, 중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청년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이 합류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미국 전략정보국과 합작해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됐다. 1946년 5월 16일 해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