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 '자족감' 빠져 현실 인식 취약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 전락
'징비록의 교훈' 되새겨야
'자기 확신'은 지적 활동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바로 '반성'이고 '점검'이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감각이나 감성을 믿고, 과거 지향적이며,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본다.
지적인 사람은 이성적·논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그다음으로넘어가려 하고,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려 하고,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보려 한다.
세상을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진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철학자 주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서양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그것 만큼이나 무게감이 있다. 그의 말이다.
"오늘 배우지 아니하고서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며, 올해에 배우지 아니하고 내년이 있다고 하지 말라."(勸學篇) 더 나은 내일과 더 발전된 내년을 원하거든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공부(배움)는 지적 활동이다. 미래는 지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연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살다간 사람을 꼽을 때 소크라테스는 빼지 못한다.
"나는 숨을 쉬는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진리를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오."(변명) 세상을 진보시키려는 자신의 노력과 '지적 능력'의 발휘를 일치시켰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적인 활동에 반대되는 행위는 이미 흡수한 신념을 자세히 점검하지 않은 채 계속 소유하면서, 자신을 거기에 맹목적으로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이때 소유된 신념이 '스스로 참되다고 확신하는 믿음'(true belief), 즉 '자기 확신'이다. 이것은 지적 점검을 거친 '지식'(knowledge)과 구분된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 즉 '성심'(成心)이라 했다. 장자에 의하면, 제대로 된 공부는 '성심'을 깨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성심'을 깨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는 점검을 거치지 않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지적인 점검 과정을 통해서만 열린다. '자기 확신'은 지적 활동 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려는 지적인 노력이 바로 '반성'이고 '점검'이다. 그래서 지식을 '점검된 자기 확신'(justified true belief)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비이성적이며, 감각이나 감성을 믿고, 과거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지키려 하고,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고,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본다.
지적인 사람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소유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려 하고,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려 하고, 세상을 보여지는 대로 보려 한다.
세상을 보고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항상 진다.
점검하는 습관이 길러지지 않아서 지적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으면, 점검하고 생각하는 일을 귀찮아하면서 '자기 확신'에 빠지는데, 이때는 주로 프레임 씌우기로 날을 보낸다. '종북 좌빨'이나 '토착 왜구'나 '친일파'나 '반일파'라고 하는 것들은 다 사유의 정지를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데, 그렇게 하도록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다.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어떤 생산적인 효율도 생기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선 채 시대를 과거에 묶어두기만 한다. 우리는 철저히 과거에 묶였다.
미래 담론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념가'들은 지적인 진보가 멈췄거나 오히려 그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진보 우파나 진보 좌파는 모두 사라지고, 그저 보수 우파와 보수 좌파만 남은 연유이다.
이념가들은 저 높은 곳에 이념을 걸어놓고 거기를 향해 과감하게 비상하려다 보니 현실을 구제하려는 사명감보다는 오히려 몽환적인 자기 확신에 빠진다.
몽환적인 감성과 확신 속에 도덕적 우월감이 깃들어 있지만, 이는 헛된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 된다. 염치와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약문의 제1조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문에 대하여 청나라 대표인 이홍장은 양국 모두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추가하자고 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였다.
1876년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해서 강화도에서 조선과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 다음에 조약을 맺으면서 제1조를 조선의 독립으로 삼았고, 일본이 우위를 점한 채 조선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제1조도 조선의 독립이었다.
당시 조선은 무능하고 무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독립협회를 세워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즈음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세자 순종을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나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 즉위식 행렬은 일본군이 호위를 했다. 대한제국에서 '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임을 의미하지만, 자주 독립국의 기상은 찾기 힘들다.
8년 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적 주권은 일본이 가져갔다. 그 후 다섯 해가 지나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 합병된다. 나라가 사라졌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저런 '영은문'들을 부수면서 자주와 번영과 독립을 확보한 듯한 심리적이고 몽환적인 자족감에 취해 있다. 자기 확신에 갇혀 몽환의 시절을 다시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 등의 서양 세력에 굴복당하고, 1853년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 당했다.
중국과 일본은 굴복당하고 나서 과감히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전면적인 쇄신에 나섰다. 쇄신의 주요 내용은 '서양 학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무지몽매했으며, 무지가 만든 몽환적 자기 확신으로 서양을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면서 위정척사로 편을 갈라 내부적인 싸움에만 골몰하였을 뿐이다.
내부적인 작은 싸움에 갇힌 채, 그것을 세계적인 큰 싸움인양 착각하는 몽환의 상태였다. 점검되지 않은 자기 확신 때문이다.
이때도 모두 힘을 합치기만 하면 서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결사 항전의 선동과 결기가 무성하고도 무성했다. 자기 확신에 빠져 선동과 결기만으로 버티다가 결국은 나라를 뺏겼다. 우리는 지금도 위정척사의 세월을 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확신'은 우리 전체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지금은 주도권을 가진 통치 세력의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통치 주도 세력의 주요 인물인 문정인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북한의 '민족 이익'과 미국의 '동맹 이익' 요구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평하면서, 우리의 '국가 이익'을 위해 양쪽 모두에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시사IN 제612호)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것이 통치 주도 세력의 공통된 인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무기도 민족 이익 수호 차원의 것이고, 미사일 발사로 하는 협박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악담이나 조롱들도 모두 민족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이전의 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밝혔듯이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정통성을 북한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읽힌다. 북한 추종의 근거이다.
사실 여기서부터 모든 몽환적인 통치 행위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민족 이익'을 수호하는 국가로 보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형성한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이다.
북한을 추종하여 무조건 이해하고 편을 들며, 중국에 굽신거리고, 미국을 미워하며, 일본을 반대한다.
문제는 추종하여 이해하고 편을 들어주지만, 북한은 계속 위협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긴다는 점이다. 뒷골목도 아니고 국가 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위협과 조롱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선의로 해석하려고 몸이 달았다. 세계 외교사 어디를 봐도 국가 사이에 이런 관계를 형성해서 자존을 지키거나 생존을 담보하거나 실익을 얻었던 예는 없을 것이다.
자존과 생존과 국가적 실익을 포기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더 중요한 어떤 몽환적 주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할 일이다. 이런 태도가 정권에는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는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통치의 핵심적인 지혜를 간결한 언어로 남겼는데, 이런 대목도 있다.
"최상의 통치는 아랫사람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 정도만 의식한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에 친밀감을 느끼며 떠받든다. 그다음은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조롱한다."(도덕경 17장) 국가 통치의 효율성이나 건강성의 정도를 순서대로 밝혔다.
조롱받는 단계에서 국가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저기서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롱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롱 다음의 단계는 순서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파국적인 일일 가능성이 크다. 조롱도 자기 의도에 따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소해버리고 나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살피지 않으면 조롱 다음에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한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감각을 믿고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에 의해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독도 주변의 카디즈나 영공에 중국과 러시아 비행기가 멋대로 들락거리고, 일본은 경제를 통해 한국 흔들기에 나섰고(미국이 뒤에서 함께 벌인 일일 수도 있다), 미국은 문재인 대통령 어투까지 흉내 내가면서 방위비 증액 등으로 압박을 하고, 한미동맹은 이혼 직전인 부부처럼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은 협박과 위협과 조롱에 거침이 없다. 대한민국은 어떤 자신감에 의한 것인지 몰라도 진정한 '우방'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선동이나 결기에 머문 주장이 아닐 수 있을까? '종북굴중혐미반일'(從北屈中嫌美反日)의 구도를 유지하면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 비책은 무엇인가?
일본과 실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건문으로 '평화 경제'만 이루어진다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망연자실할 뿐이다.
모든 경제 지표가 다 악화일로인데, 대통령은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하다고 한다. 몽환적 자기 확신에 빠져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기 때문이다.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한 정확한 현실 인식이 취약한 것 같다.
'자기 확신'에 빠지면 점검 능력과 반성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최소한의 지적인 능력이라도 있다면, 반성하고 점검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수를 하더라도 반복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교정도 한다. 반성 능력이 떨어지면, 하던 실수를 반복한다. 나라들 사이에도 침략을 하던 나라가 또 침략을 하고, 침략을 당했던 나라가 다시 침략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성과 점검 능력이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정권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뼈에 새겨야 할 치욕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치욕을 다시 당하고 싶지 않으면 분노하고 결기만을 보일 일이 아니라 우선 서애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懲毖錄)부터 읽어야 한다.
이 책에 반드시 새겨야 할 세 가지 교훈이 들어 있다. 첫째, 한 사람이 정세를 잘못 판단하면 천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둘째,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국방을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셋째, 전쟁 같은 큰 일이 닥쳤을 때에는 반드시 나라를 도와줄 만한 우방이 있어야 한다.
차라리 섬뜩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최진석 건명원 초대 원장·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