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계성리에서 남한 지역 절터 최초로 육각형 건물터가 발견됐다.
화천군과 강원고고문화연구원(원장 지현병)은 보물 제496호 화천 계성리 석등 주변 정비를 위해 절터 추정 지역에서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육각형 건물터와 석탑터, 석등터, 중문터 등을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고려시대 유물인 계성리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절터에서 약 200m 거리로 이전돼 원위치를 알 수 없다. 이번에 나온 건물터처럼 석등도 육각형으로, 육각 석등은 한반도에 네 점만 현존한다고 전하며 그중 하나가 정양사 석등이다.
계성리 절터 중심 사역(寺域)에서 드러난 육각형 건물터는 본존불을 모신 금당(金堂)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깬돌을 깔았는데, 불상을 놓는 불대좌(佛臺座)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육각형 기단에는 고맥이초석(측면을 깨끗하게 마감하기 위해 만든 특수한 초석)을 썼다.
기단 한 변 길이는 5.4∼5.7m이며, 적심(積心·주춧돌 주위에 쌓는 돌무더기) 지름은 1.8∼2.2m다. 기단을 기준으로 추산한 면적은 약 88.2㎡다.
연구원 관계자는 "정양사 육각형 법당터에도 석조본존불이 배치돼 있다"며 "계성리 절터 육각형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정면 3칸·측면 3칸인 사각형 건물로 바뀌었으며, 면적은 132.7㎡로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 건물터 동서에서는 사각형 건물터 유적이 나타났다. 특히 동쪽 건물터에서는 고사리 모양 무늬인 궐수문(蕨手文)을 새긴 타원형 석조 화덕시설이 발견됐다.
연구원 측은 "고려시대 화덕시설 중에 가장 화려하고 격조가 높은 유적으로, 당시 차 문화 일면을 보여주는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로 평가된다"며 "육각형 건물터 동서 건물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다 조선시대에 축소해 재건된 듯하다"고 추정했다.
육각형 건물터와 동서 건물터가 에워싼 공간에서는 석등터 2개와 탑터 1개가 드러났다. 사역 중앙에 있는 탑은 비교적 큰 석재를 배치한 뒤 깬돌로 적심을 조성했다. 탑터 남쪽으로는 회랑터가 있으며, 화랑 가운데에서 사찰을 드나드는 중문터가 확인됐다.
유물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제작한 기와와 자기가 수습됐다.
조사단은 발굴 결과와 관련해 고려 인물 최사위에 주목했다. 본관인 수주(水州)인 그는 문하시랑평장사·태자태사·내사령 등을 지냈으며, 사원과 궁궐 축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행적을 돌이나 도자기에 새긴 유물)에 낭천군 개통사(開通寺)와 계성사(啓星寺), 개차근산(금강산) 정양사(正陽寺)가 언급됐다.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성사가 계성산에 있다"는 내용이 있으며, 1799년 사찰 연혁을 정리한 책 '범우고'(梵宇攷)는 "계성사가 지금은 폐사했다"고 기록했다.
/편지수기자 pyunjs@kyeongin.com
화천군과 강원고고문화연구원(원장 지현병)은 보물 제496호 화천 계성리 석등 주변 정비를 위해 절터 추정 지역에서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육각형 건물터와 석탑터, 석등터, 중문터 등을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고려시대 유물인 계성리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절터에서 약 200m 거리로 이전돼 원위치를 알 수 없다. 이번에 나온 건물터처럼 석등도 육각형으로, 육각 석등은 한반도에 네 점만 현존한다고 전하며 그중 하나가 정양사 석등이다.
계성리 절터 중심 사역(寺域)에서 드러난 육각형 건물터는 본존불을 모신 금당(金堂)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깬돌을 깔았는데, 불상을 놓는 불대좌(佛臺座)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육각형 기단에는 고맥이초석(측면을 깨끗하게 마감하기 위해 만든 특수한 초석)을 썼다.
기단 한 변 길이는 5.4∼5.7m이며, 적심(積心·주춧돌 주위에 쌓는 돌무더기) 지름은 1.8∼2.2m다. 기단을 기준으로 추산한 면적은 약 88.2㎡다.
연구원 관계자는 "정양사 육각형 법당터에도 석조본존불이 배치돼 있다"며 "계성리 절터 육각형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정면 3칸·측면 3칸인 사각형 건물로 바뀌었으며, 면적은 132.7㎡로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 건물터 동서에서는 사각형 건물터 유적이 나타났다. 특히 동쪽 건물터에서는 고사리 모양 무늬인 궐수문(蕨手文)을 새긴 타원형 석조 화덕시설이 발견됐다.
연구원 측은 "고려시대 화덕시설 중에 가장 화려하고 격조가 높은 유적으로, 당시 차 문화 일면을 보여주는 유구(遺構·건물의 자취)로 평가된다"며 "육각형 건물터 동서 건물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다 조선시대에 축소해 재건된 듯하다"고 추정했다.
육각형 건물터와 동서 건물터가 에워싼 공간에서는 석등터 2개와 탑터 1개가 드러났다. 사역 중앙에 있는 탑은 비교적 큰 석재를 배치한 뒤 깬돌로 적심을 조성했다. 탑터 남쪽으로는 회랑터가 있으며, 화랑 가운데에서 사찰을 드나드는 중문터가 확인됐다.
유물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제작한 기와와 자기가 수습됐다.
조사단은 발굴 결과와 관련해 고려 인물 최사위에 주목했다. 본관인 수주(水州)인 그는 문하시랑평장사·태자태사·내사령 등을 지냈으며, 사원과 궁궐 축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행적을 돌이나 도자기에 새긴 유물)에 낭천군 개통사(開通寺)와 계성사(啓星寺), 개차근산(금강산) 정양사(正陽寺)가 언급됐다.
조선시대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성사가 계성산에 있다"는 내용이 있으며, 1799년 사찰 연혁을 정리한 책 '범우고'(梵宇攷)는 "계성사가 지금은 폐사했다"고 기록했다.
/편지수기자 pyunj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