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조직 지원 추정… 재조명 필요

각종 자료와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인천지역 철시는 191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어지면서 상당수 상점이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인천에서는 당시 잡화상이었던 18세 김삼수(金三壽·1901~?)와 객줏집 사환이었던 15세 임갑득(林甲得·1904~?)이 철시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고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일 나이였다. 10대 소년 2명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에 철시하라는 경고문을 뿌리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1심과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삼수가 3심(상고심) 재판부에 제출한 200자 원고지 약 10매 분량의 '상고 이유서'가 아직 남아있다.
그 내용이 잡화상이 직업인 소년이 썼다고 하기엔 매우 논리정연해 눈길을 끈다.
김삼수는 상고 이유서에서 "지금 시대는 타인을 노예로 하는 자도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는 자도 없다"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했다.
평범한 상인의 철시투쟁까지도 견고한 논리의 항일민족의식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의미다.
물론 상고 이유서 내용을 고려하면, 김삼수가 직접 쓰지 않고 누군가의 조력을 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김삼수와 임갑득을 지원한 항일운동조직이 있었고, 인천지역 철시투쟁도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천 철시투쟁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만세시위와 함께 일반 민중이 대거 참여했던 항일운동인 만큼 구체적인 재조명 작업이 필요하다. 김삼수의 상고 이유서 등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판결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