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독립군 지원자 모집해 만주로 보내는 일 맡아
밀정 때문에 붙잡힌 '대동단 사건' 징역 3년형
만세시위로 검거 등 공훈록 내용 사실과 차이
병보석 중 신한촌 망명… 러시아에서도 활동
강화에 학교 설립 등 교육운동가로도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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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은 1919년 3·1운동 직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추진하고,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까지 계획했던 비밀조직인 대동단(大同團)의 주역이었다.

또 고향 강화도에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친 교육자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경근이 대동단은 물론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결돼 국내외 항일투쟁을 매우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당시 자료가 많다.

하지만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한 유경근의 행적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그 시점이 맞지 않는다.

최근 유경근을 재조명한 몇몇 기록이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바탕으로 쓰이다 보니 그의 정확한 행적을 드러내지 못하고 틀린 부분도 있다.

일제강점기 공문서와 신문기사 등을 근거로 유경근의 행적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데 그 한계는 명확하다.

공문서는 유경근이 이른바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당시 여러 관계 인물의 신문조서, 공판기록, 판결문 등 일제의 시각을 반영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1919년 3월 18일 유경근이 강화군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고창했다고 썼다.

 

이때 주모자를 색출하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 문제로 보석됐다고 기록했다. 

 

유경근이 강화 3·1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강화 만세시위 때문에 체포됐거나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갔다고 한 내용은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유경근은 1919년 7월 21일 전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1920년 2월 17일 서대문감옥 병감(病監)에서 판사의 심문을 받았다. 당시 44세였는데, 류마티스로 발로 설 수 없고 전신이 아프다는 사유로 법정에 가지 못했다. 

 

직업은 광업이고, 주소는 경성부 공평동 153번지라고 답했다. 당시 6년 전부터 서울에 살고 있었고,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때는 강화에 있다가 3월 말께 경성으로 돌아왔다. 

 

대동단 산하 11개 지단 가운데 군인단 총대장을 맡고 있던 유경근은 만세시위가 아닌 독립군 지원자를 만주로 보내다 발각돼 체포됐다. 

 

건강이 좋지 않아 1920년 2월 심문 이후 어느 시점에 주변인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유경근은 체포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 관철동에 있는 조선여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여러 신문조서를 보면, 조선여관은 강화 출신이 운영했기 때문에 강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유경근은 조선여관에서 강화 출신 조종환(1890~1937) 등 몇몇 인사와 접촉해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보낼 독립군 지원자를 모집했다. 

 

유경근은 강화에서 함께 교육운동을 펼친 이동휘(1873~1935)와 각별했는데, 이동휘는 1919년 4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을 조직·훈련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그해 9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선출됐다.

유경근은 조종환 등의 소개로 노준, 현완순, 조규상, 고경진, 위계후 등 8명을 독립군 지원자로 모집했다. 1919년 7월 초순 독립군 지원자들을 차례로 신의주로 보냈는데, 양복을 입히고 여비까지 줬다.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낼 때 유경근은 한글의 자음을 아라비아 숫자로 하고, 모음을 한자의 숫자로 하는 방식(예컨대 '7五'는 '소')의 암호까지 사용할 정도로 조직적이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독립군 지원자 가운데 영광경찰서 '밀정'인 조규상이 잠입해 있어 유경근은 곧 붙잡혔다. 

 

일제는 유경근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휘의 지령을 받아 독립군 지원자들을 보내려 했다고 봤다.

 

이후 유경근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도 이동휘와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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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중 탈주한 유경근을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1922년 3월 5일자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유경근은 대동단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과 관련해 해외 임시정부를 국내로 연결하는 연통제 조직의 총책이기도 했다. 중국 톈진에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였다. 

 

불변단은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특파원' 역할을 했다. 불변단 단장을 지낸 명제세(1885~?)는 임시정부로부터 유경근을 만나 '제2차 독립 만세 시위'를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1919년 9월 톈진에서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 조선여관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지는 못했다. 유경근이 체포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대신 명제세는 조선여관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종석(1896~1927)을 만나 국내 비밀단체들과 접촉했다. 

 

강화 출신인 윤종석은 당시 유경근의 서울 연통제 임무를 이어받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유경근의 보석을 위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10월은 '제2차 독립 만세 시위' 계획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조직들이 급박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애초 거사일은 그해 10월 31일이었다. 

 

윤종석은 상하이나 만주에서 입국한 인사가 민강(1884∼?)의 집으로 와서 "가용 청심환을 달라"는 암호를 말하면, 동지인지 확인한 후 기밀문서를 받거나 다른 인사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시도하던 대동단 간부 전원이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면서 윤종석도 경찰에 붙잡혔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으로부터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해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 결사대장 김영철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 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유경근이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유경근은 앞선 '대동단 사건'으로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 항소를 거쳐 1921년 5월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각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겹쳐 착오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복군총영 결사대장 김영철(1892~1969)이 유경근의 집에 폭탄과 총기를 숨겼을 때 유경근은 병보석으로 출옥한 시기였다. 

 

김두섭의 종로경찰서 심문조서와 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신문기사 등을 보면, 유경근은 사건 당일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증손인 유용갑이 집에 있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작성한 가택 수색조서를 보면, 경찰은 8월 22일 새벽 유경근의 집에 들이닥쳐 공석(空石)에 싸여 있는 폭탄 3개, 권총 3자루, 탄환 167발을 압수했다. 

 

집을 비웠던 유경근은 이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지는 않았지만, 광복군 무기를 숨겨주는 일을 집주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보석 중이던 유경근이 고등법원 확정판결을 받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망명한 기록도 있다. 

 

동아일보는 1922년 3월 5일자 신문에서 '대동단 사건'에 관계된 유경근이 보석 중 도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에 '결석 판결'로 징역 3년에 처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월 3일 청진항으로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유경근이 신한촌으로 언제 갔는지,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에 관한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러시아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사다. 

 

유경근의 손자 유부열(74)씨는 교직에 있다가 2008년 퇴직한 이후 줄곧 할아버지의 일생을 연구하고 있다. 유부열씨는 "할아버지가 신한촌으로 망명해 군관학교를 설립하려다 10개월 만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천 강화군 월곶리에 있는 유경근 묘소. /경인일보DB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유경근이 옥고를 치른 이후 행적이라는 듯 마지막 부분에 '그 후 강화군에서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시점이 틀린 내용이다. 

 

유경근은 대동단 활동 이전인 1905년 강화에 있던 자신의 집에 광창(光昌)학교를 설립했다. 

 

광창학교는 보창학교를 설립한 이동휘의 영향으로 1906년 7월 보창지교(普昌支校)로 이름을 바꿨고, 1909년 광명(光明)학교로 개편했다. 유경근이 세운 학교는 1913년 문을 닫았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경근은 이동휘가 1933년 신한촌에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1935년 2월 추도회를 주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동아일보가 1935년 2월 26일자에 보도했다. 

 

유경근은 강화에 머물면서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활동이 어려워졌지만, 교육운동에는 손을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5년 3월 5일자 기사를 보면, 강화군 부내면에서 "7만 군민의 일대 숙제"라며 '강화중등학교 설치 간담회'가 열렸는데, 유경근이 좌장을 맡았다.

유경근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이나 학교의 문을 조선총독부가 있는 동쪽과 일본 땅이 있는 남쪽으로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집안에는 일본식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직업으로 삼은 금광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1939년 3월 광세 체납으로 압류돼 경매 매물로 나온 인천지역 9개 금광 가운데 '강화 유경근 씨 소유의 길상면 금광'이 포함됐다.

 

손자 유부열씨는 "독립유공자 공적을 올릴 당시에는 자료가 적어서 지금 보면 틀린 내용이 많다"며 "할아버지는 출옥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가는 와중에도 강화에서 교육운동에 앞장섰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