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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만주 만보산 한·중 농민 갈등, 무력충돌로 부풀려 보도
중국침략 구실 '오보'가 인천發 화교습격 비극 초래…
음모 알아차린 권평근 배일연설 계획 도중 체포돼 옥고

1919년 강화서 독립운동 가담…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
해방직후 미군 입항때 동원된 日경찰 총탄에 맞아 숨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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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멀리 중국에서 날아온 '오보(誤報)' 하나가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중국 동북지방 창춘(長春) 만보산(萬寶山)의 동포가 중국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200명이 다쳤고, 병력까지 출동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한 1931년 7월 2일 조선일보의 호외는 화교가 많았던 개항도시 인천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기사는 한·중 농민 사이 발생한 작은 충돌이 일본의 흉계에 의해 부풀려져 전달된 완벽한 오보였지만, 이를 알 길이 없던 시민들은 인천의 화교들에게 분풀이를 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오늘날까지 인천 화교 사회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만보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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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권평근. /국가보훈처 제공

결국 만보산 사건은 일제의 계략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게 드러났고, 화교로 향했던 분노의 화살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인 습격과 항일투쟁이 비밀리에 계획됐고, 이는 반중(反中)이 반일(反日)로 바뀐 '방향전환사건'이라 불렸다. 

 

인천 방향전환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독립운동가 권평근(1900~1945)이다. 강화 출신의 그는 인천 노동계를 대표하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방향전환사건의 계기가 됐던 만보산 사건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일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을 대륙 진출의 첨병으로 활용했다. 

 

만주지방의 농장으로 이주시켜 한국인 보호 명목으로 경찰과 군대를 중국에 주둔시키고 내정에 개입하려 했고, 중국인들은 이런 이주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만보산 농장 지역에는 1931년 4월 한국인 200여 명이 이주했는데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계약 착오로 중국 지주의 땅을 침범해 충돌이 빚어졌다. 

 

그해 7월 1~2일 중국인이 한국인이 파냈던 수로를 다시 흙으로 되묻어 복구하자 한·중 농민 사이 대립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중국인을 쫓아내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일제는 이 사건과 관련한 거짓 정보를 중국 주재 김이삼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에게 흘렸다. 

 

한·중 농민 사이 무력 충돌이 빚어져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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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삼은 일본 영사관 측을 통해 얻은 공식 정보라 현장 확인을 하지 않고 의심 없이 이 소식을 본사에 전했다. 

 

조선일보는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호외를 제작했다. 

 

당시 호외는 만보산에서 동포 200여 명이 중국인 800여 명과 충돌해 부상을 입었고, 창춘의 일본 주둔군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일본과 중국의 관헌이 1시간여 교전을 벌였고 중국 기마대 600여 명이 출동하는 등 급박한 상황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7월 3일 첫 호외를 발행하고 이튿날 2차례나 호외를 내는 등 사태를 심각하게 보도했다. 동포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동아일보도 이를 받아 중국 농민의 폭거로 우리 농민이 포위됐고, 군대까지 출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오보는 인천 지역사회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다.

 

인천 화교에 대한 집단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1883년 개항한 인천은 당시에도 '국제도시'였다.

 

중국 상인들이 인천에 물밀듯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인천에는 중국인 거류지가 따로 형성됐다. 바로 지금의 중구 북성동 일대 차이나타운이다. 

 

1933년 일본 측이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에 따르면 인천의 화교는 1897년 1천331명이었다가 1931년 2천427명으로 크게 늘었다.

인천의 화교들은 상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노동자들이 인천항을 통해 전국으로 유입됐다.

 

1928년 4월 6일 동아일보는 "격증하는 중국 노동자 하루 1천여 명 입항"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짜장면이 바로 인천항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먹던 면 요리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일자리를 나눠 가져야 하는 인천시민은 가뜩이나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라 만보산 사건은 화교 습격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7월 3일 인천에서 처음으로 한국인 5명이 중국인 식당과 이발소, 호떡집을 공격해 유리창을 깨는 사건이 발생했다. 

 

격앙된 군중들은 중국인 거주지로 몰려들어 집에 돌을 던지고 집기를 부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 2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으며 건물 68채가 파괴됐다.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돼 서울, 평양 등지에서도 중국인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평양에서는 무려 94명의 중국인이 숨졌다.

그런데 일제의 낌새가 수상했다. 일제는 중국인을 위협하면 발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도 폭동을 내심 모르는 척 했다. 

 

결국 이 사태가 일본의 음모로 꾸며진 일이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고, 일본에 대한 저항심으로 발전했다. 타깃이 중국인에서 일본인으로 바뀐 '방향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인천 노동운동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권평근은 만보산 사건의 방향전환을 독립운동으로 승화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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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전환사건으로 체포된 권평근에 대해 법원이 징역 3년을 선고했다는 동아일보 1931년 10월 27일자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권평근은 7월 4일 뜻을 함께하는 애국지사들과 회합을 하고 다음날 인천공회당에서 열리는 신간회 인천지회, 인천청년동맹, 인천노동조합 주최의 시국에 관한 연설회를 이용해 배일 연설을 하기로 했다. 

 

만보산 사건의 원인이 중국이 아닌 일본에 있다는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이끌고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기밀이 새어 나가 배일연설과 만세시위 계획은 미완에 그쳤고 권평근 등 가담자 6명이 체포됐다. 

 

권평근은 그해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일본은 방향전환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1931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성지방법원은 권평근에 대한 재판의 일반방청을 허용하지 않고, 비밀리에 개정했다. 

 

당시 언론에는 인천에서 일어난 대(對)중국 폭동의 방향을 일본으로 전환하고, 공산당 재건을 위한 음모를 꾸민 일로 보도됐다.

권평근의 독립운동은 방향전환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1900년 1월 26일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118번지에서 태어난 권평근은 강화의 합일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1년여 공부하다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강화에서 대규모로 벌어진 3·1 운동에 가담했다. 1921년 강화 조산교회의 청년단체인 조산엡윗청년회에 참여했고, 이 무렵 같은 강화 출신의 죽산 조봉암과 교류했다. 

 

박남칠, 유두희, 이승엽 등 청년 지도자들과 함께 사회운동과 대중 연설에 적극 참여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1926년 11월 광둥성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권평근은 이후 상하이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명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일제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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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처음 당도한 미군들. /경인일보DB

1927년 말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권평근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30년 5월 조선우선회사에서 일하면서 '메이데이 예비검속'으로 체포됐다. 그는 1931년 4월 30일에도 '전 조선 무산대중에 격함'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해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평근은 또 1931년 6·10 만세운동 6주년을 맞아 "모든 조선 민중은 단결해 자유와 주권획득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했다. 방향전환사건은 그로부터 약 1달 뒤에 일어났다.

출소 이후로도 인천노동조합을 이끌던 권평근은 해방 한 달도 되지 않은 1945년 9월 8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24사단 주력부대가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당시 인천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보안대와 노동조합이 군중을 이끌고 부두로 환영 행진을 했는데 보안대원으로 활동하던 권평근과 이석우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미국이 치안유지 명목으로 일본 경찰을 동원했고, 행진을 가로막는 일본 경찰과 실랑이를 벌어다 빚어진 참사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의 총탄에 희생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당시 조봉암은 오랫동안 연을 맺은 고향 후배 권평근의 주검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자력으로 얻은 독립이 아니었기에 더 서글픈 일이었다.

브루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쓰면서 1945년 9월 12일 뉴욕타임즈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하지 중장은 기자들에게 "한인과 일인 사이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다. 그중에는 부두에서 우리를 환영하려는 일단의 한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발포가 있었다. 나는 민간인들이 상륙작전에 방해가 될 것이므로 부두에 접근하지 말도록 명령한 바 있다"고 했다. 

 

하지 중장은 '점령군'의 자세로 인천항에 왔던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며 미군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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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7월 5일 인천경찰서가 제작한 권평근 등 인천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동향 보고. /국사편찬위원회

1945년 9월 12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건준 인천지부가 미군을 통해 일본 관헌에 대해 엄중히 항의했으나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권평근의 장례는 9월 10일 오전 10시 건준 인천지부에서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박남칠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시가 행렬 이후 권평근은 주안정(朱安町) 공동묘지에 묻혔다.

권평근은 좌익 노동운동 경력 때문에 독립운동 공로까지 인정받지 못하다가 60주기였던 2005년 뒤늦게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을 받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