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민 많이해… 문인 이름 내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
북방정서 함축 평가 수상작 '저항', 나름의 '인간 선언' 담아
20~70대 다양한 연령 꾸준한 발걸음에 25년째 문화원 강의
주자의 시경 수업·발표작등 하나하나 정리해 책 내놓을 것
수상작은 지난해 여름에 발표한 시 '저항'이었다.
올해로 창간 10주년을 맞은 계간 '문학청춘'은 통일시대를 염원하면서 민족시인 이용악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용악 문학상'을 제정했으며, 그 첫 수상자로 김영승 시인을 선정해 시상했다.
심사위원회는 '저항'에 대해 "세심한 언어 선택에 고심하면서 주제를 내면화하려는 응축의 미학을 겨냥한 흔적을 보여준다"며 "시인이 축적해온 시적 성취의 연장선에서 공동체적인 연민과 연대 의식을 함축하면서 북방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손색없다"고 평했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이용악(1914~1971)은 1930년대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북방시인으로 불린 이용악의 시는 주로 강한 의지력, 침통한 정조,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성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용악 문학상' 수상 후 2주 정도 지난 22일 김영승 시인을 만났다.
인천 미추홀구 석암초교 인근의 카페 '안단테 에스프레시보'에서였다. 시 모임 카페로도 잘 알려진 이 곳은 지난달 김 시인의 '시경(詩經) 낭송회'가 펼쳐지기도 했다.
수상 소감을 묻자 김 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용악은 백석만큼 작품이 많진 않지만, 시의 톤이 굵고 북방적 정서가 짙죠. 많이 꾸미려 들지도 않았어요. 월북작가이다 보니 다소 희소성도 있기 때문에 문학상의 형태로 접근했다고 보고요. 시상의 주체를 떠나서 저 김영승이 제1회 수상자로서 이 상에 권위가 부여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수상 수락까지 번민을 하다가, 강하게 의미 부여하기로 하고 수락했죠. 21세기 복잡다단하고 분단된 우리 현실에서 이용악이 재생·복원되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김영승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장을 찾았던 소설가 박정규 전 서울과기대 문창과 교수는 행사 후 개인 SNS에 "큰 족적을 남긴 문인을 기리기 위해 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을 제정했다면 최소한 제1회 시상식에서만이라도 문학상 제정의 의의와 그 이름을 건 문인의 문학사적 의미를 밝히기 위한 간단한 세미나라도 가져야 이름을 내건 문인이나 그 문학상의 수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라고 남겼다.
첫회 시상식에 걸맞은 다채로운 부대행사가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마음이 여리디여린 것으로 소문이 난 김영승 시인의 입장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주최측의 문제일 뿐, 행사의 부족함이 이용악이나 김영승 시인의 작품세계를 폄훼할 수는 없을 터.
이용악과 김영승 시인을 연결해 준 '저항'을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해 발표된 시예요. 많이 잊혀졌는데, 구 소련 체제에서 핵 발전소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접했어요. 재미 한국인으로서 모스크바 대학에 연구하러 간 학자가 희생자에 관한 기록을 찾은 거였죠. '저항'은 정치적이거나 피압박자들의 저항은 아니에요. 거기서 머물렀다면 모든 시의 패턴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나의 삶이 약간 투영됐어요. 알베르 까뮈 식의 '반항'으로 볼 수 있죠. 저항을 한다는 것은 약자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인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아프건 슬프건 억울하건 행복하건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통찰하는 삶이 저항이며, 시를 통해 저 나름의 인간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레 시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1천302편의 연작시 '반성'으로 이어졌다. '반성'은 올해로 출간 32주년을 맞았다.
"1천302편('반성·序'를 더할 경우 1천303편)의 연작시 '반성'은 그 자체로 시인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의 문학입니다. 주로 내가 처했던 가난에 관한 구체적 육화의 소산이며, 고도의 비유문학이에요. 정통적인 예쁜 서정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반성'이 먼저 알려져서 그렇지, 이전에 쓴 서정시가 많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슬프더라도 서정시를 쓸 때 나는 건강하다고 느낍니다. 연작시로는 '반성'을 비롯해 각각 2천 편이 넘는 '권태'와 '희망'이 있고요. '반성'의 내용이 파격적이다 보니 문단과 언론에서 조명이 많이 됐는데, '반성'에서 추구한 것은 쉬운 시였어요. 아주 쉬운 언어로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게 좋은 시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서법을 구사했으며, 문법 일탈도 없습니다. 요즘에야 젊은 비평가들이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요새 젊은 독자들은 한자어라면 질색을 하곤 한다.
김영승 시인의 이번 수상작 '저항'에서도 그렇지만 그동안 써 온 '반성' 등 여러 작품에 한자어가 많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할까.
"출판사에서도 자주 연락이 와요. '한자를 한글로 바꾸거나 한글과 병기하면 안 되냐'고요. 제 대답은 '안 된다' 입니다. 지식 자랑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한자 자체의 미학이 있어요. 시각적인 것도 좀 다르고요. 그리고 시를 썼을 때 초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걸어가면서 쓰기도 하고, 식당에서 전단지 뒷면에 쓰고, 신문의 여백에도 쓰는데, 쓸 당시의 시어를 한글로 썼으면 한글로, 한자로 썼으면 한자로 그대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김영승 시인에게 인천은 어떤 공간일까.
"인천은 태어나 살고 있는 '삶의 세계(Lebenswelt)'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지금 여기(Now and Here)'이며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기도 하고요. 소재주의에 빠져서 인천항, 소래포구, 맥아더 동상이 드러나야 인천이 아니라, 나의 움직임인 동선 전부가 인천입니다. 인천에서 좌절하고 상처받고, 절망하기도 하고, 꿈도 꾸고 감사함도 느꼈습니다. 인천에서의 성장과 나의 삶은 내 수만 편의 시에서 나타납니다."
김영승 시인은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강의는 중단하고, 인천의 연수문화원과 부평문화원에서 각각 두 개 강좌씩 만을 맡고 있다.
두 문화원 설립 이후 꾸준히 강의를 이어오고 있는데 올해로 벌써 25년째가 되었다.
"당시 65세 할머니 한 분을 대상으로 시작한 강의가 소문을 타면서 지금까지 진행됐습니다. 현재 연수문화원에선 '문예창작특강'과 '해설과 함께하는 한국현대시 100년의 명시 감상'을, 부평문화원에선 '시창작교실'과 '동양고전강독-주자의 시경집전을 저본으로 한 김영승 주해·번역 시경' 강의를 하고 있어요. 수강자들의 연령대도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합니다. 제가 이곳을 못 떠나는 이유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꾸준히 수강해 주시는 분들 때문입니다. 장애를 안고 있는 분들도 계신데,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이런 분들 앞에서 내가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번 하면 오래 이어가는 제 습성도 한몫했을 겁니다. 지금은 제 생활 리듬을 문화원 강의와 창작에 맞추면서 더욱 건강해진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시경 강의는 책으로도 출판할 예정이에요. '시경'을 그동안 철학의 한 분야로 다뤘는데, 방대한 번역과 주해만큼이나 오류도 많아요. 시경은 시적 언어이기 때문에 첫 행에 있는 말이 마지막 행에 걸리기도 하죠. 또한, 자리를 바꿔서 의미가 통하는 것들도 있고요. 그런 언어 감각이 기존 시경을 번역한 학자들에게선 부족했어요. 수강생들과 어려운 시경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강의용 노트에 풀어 쓴 내용이 더해져서 방대한 책으로 묶일 것 같습니다."
김영승 시인은 그동안 출판사와 약속은 했지만, 이행치 못해 발간되지 못한 수십 권의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내놓을 예정이다.
"발표된 (책으로 엮이지 못한) 시만 해도 10여 권 분량은 될 정도입니다. 모든 시에 동등한 비중을 두다 보니 시를 편집하고 추리는 부분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움을 겪었어요. 때문에 출판사엔 시를 보내준다고 해놓고 못 지킨 적이 있었고요. 소설 출판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차근차근 이행할 것입니다."
글/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