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용 권총으로 사회에 경종 울려
보통 탄창이 회전식으로 된 연발 권총 리볼버(revolver)를 육혈포라 불렀는데 국립국어원은 그 어원이 확실치 않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육혈포를 비롯한 각종 권총은 애국지사의 무기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무기도 권총이었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권총은 벨기에산 브라우닝 M1900으로 리볼버가 아니라 손잡이에 탄창을 끼워 넣는 자동권총이었다.
안중근은 자동권총 외에도 스미스&웨슨의 38구경 리볼버(육혈포)도 마련했지만, 암살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육혈포는 소지가 간편해 품에 숨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어 일제 관료에 대한 암살에 쓰였고, 친일파를 협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육혈포로 부호들을 겨눈 애국지사들을 강도죄로 엮기도 했다.
이처럼 육혈포는 주로 적을 겨누는 데 쓰였지만, 자신을 겨누는 데 사용한 독립운동가가 인천에 있었다. 계몽운동가로서 인천에 학교를 설립해 인재 육성으로 나라의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던 정재홍(1867~1907)이다.
조선 말기 근대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화파들이 을사늑약 이후 자연스럽게 친일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던 시기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었던 정재홍은 그들의 앞에서 육혈포로 자결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친일파로 변절해 1907년 귀국한 개화파 박영효의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였다.
계몽과 개화를 내세워 친일을 정당화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정재홍은 변절자를 쏘고 자결할지와 자결만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지를 번민하다 자결을 택했다. 저격은 복수와 또 다른 적(敵)을 만들고 국가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의 육혈포가 정확히 어떤 총이었는지 어디서 구해서 어떻게 처분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육혈포의 총구만큼이나 뜨거웠던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만이 식지 않고 인천 지역에 전해질 뿐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