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성단' 조명원·조종서·최봉학·문무현 앞장
이기복·유웅렬·이난의 '태극기' 제작 힘보태
일본인에 땅 빼앗긴 주민들 불만 극에 달해
1919년 3월 28일 관청리 일대 150여명 집결
주도자들 복역후에도 고문 후유증 등 '고통'
1991년 용유中 학생들, 후손 인터뷰 책 발간
'아름다운 내 고장…' 중요 연구자료로 꼽혀
용유도 만세운동은 3월 28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조명원(1900~1968)이 3·1 만세 운동 소식을 섬으로 가져왔고, 조종서(1898~?)·최봉학(1897~1955)·문무현(1899~1970) 등이 함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를 외쳤다.
용유도 사람들은 이를 3·28 만세운동이라 부른다.
용유도는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인천대교와 영종대교 등 연륙교로 연결돼 있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어 육지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용유도는 인천항에서 20㎞ 떨어진 외딴 섬이었다.
1919년 용유도에서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근 영종도로 간 뒤, 이곳에서 또 배를 갈아타야만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 늦게나마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용유도 주민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
"조선 운동을 거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
1919년 3월 27일 밤. 용유도의 7개 마을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긴 격문 80여 통이 배포됐다. 이 격문을 제작한 사람은 조명원과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 당시 용유면 남북리에 거주하던 젊은 청년들이었다.
서울 배재학당에 다니던 조명원은 서울에서 열린 3·1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같은 달 23일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고향 용유도로 돌아왔다.
남북리 대지주의 손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 개인 교사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서울로 유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명원은 5촌 조카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과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용유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혈성단이 만들어진 곳은 지금 주소로 인천 중구 남북동 868의 '조병수 가옥'이다.
이곳은 조선 말기인 1890년 지어진 옛집으로, 1997년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조병수 씨는 조명원과 6촌 관계다.
이들은 만세운동 거사 일을 5일 뒤인 28일로, 거사 장소는 당시 용유중학교가 있던 관청리 일대로 정했다.
혈성단이 이곳을 만세 운동 장소로 선정한 이유는 용유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혈성단은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주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용유면 선임서기로 근무하던 이기복(1889~?)도 거사 소식을 접하고 을왕리에 있는 유웅렬(1896~1939)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독립을 향한 열망까지 꺾이지는 않았던 거였다. 을왕리에 거주하던 이난의(1884~1957)도 만세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해 마을 주민에게 나눠줬다.
28일이 되자 용유도 주민들은 관청리 광장에 모였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관청리 광장에는 150여 명의 용유도 주민들이 집결했다.
1894년 발행한 '영종진 사례책'에 용유도에 248호가 거주한다고 기록돼 있는 점을 고려하면 1910년대 용유도의 인구는 1천명~1천5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수의 용유도 주민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이들이 일본인에게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했다. 지세 부담을 공정하게 하고,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식민통치에 필요한 조선총독부 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토지 조사 사업은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안에 토지 소유권자가 직접 신고해 소유지로 인정받는 '신고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비 서류나 절차가 매우 까다로운 데다, 신고기간도 매우 짧아 많은 조선인이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전환했고, 이를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겨줬다.
용유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용유도에는 조선 시대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던 목장과 염전이 많았다. 1910년대만 하더라도 특정 토지 소유자가 없는 땅이 많았다.
토지 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이러한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됐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일본인에게 판매했다.
조선총독부 관련 서류를 살펴보면 1919년 총독부는 일본인 오구라 류스케에 용유도 토지를 양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1926년 용유도에 있는 임야 95만여㎡를 혼자 소유했다. 자신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용유도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용유도 주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대나무 죽창에 매달아 관청리 광장 중앙에 꽂았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대나무 장대에 있는 대형 태극기는 장정 두 사람이 들기에도 힘들 만큼 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민 150여 명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혈성단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용유도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용유면 면장이었던 정우용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날 시작된 용유도 만세 운동은 이후 이틀이나 계속됐다.
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뱃길로 십분 정도 떨어져 있던 무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시 무의도는 인천항 축항 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조달하기 위한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곳 주민과 인부들은 인천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채석장 감독이었던 일본인 마쓰다 미야타로오도 주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고 전한다.
조선총독부가 3·1 운동 동향을 파악한 문서에 따르면 혈성단 단원을 포함한 만세운동 주요 참가자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인천경찰서로 옮겨진 뒤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조명원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고, 조종서와 최봉학, 문무현 등 나머지 혈성단원은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을왕리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유웅렬도 태형 90대의 판결을 받는 등 이날 만세운동으로 처벌받은 용유도 주민은 11명이나 됐다. 용유면 서기로 일하던 이기복은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
조명원 등 혈성단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명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일제의 감시로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종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강화도로 이주했지만, 6·25 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최봉학과 문무현, 유웅렬 등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을왕 해수욕장이 있고 해당화 해송 숲이 해변을 덮고 있는 곳이 내 고장 용유도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내 고장에 일본 제국주의의 군화가 '용유의 얼'을 앗으려 했습니다. 1919년 3월 28일 우리 선조들은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1991년 용유중학교에 다니던 향토조사반 학생 8명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내 고장 용유도'라는 책을 냈다.
당시 학생들은 용유도에 거주하던 만세운동 참가자 후손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3·28 독립운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이들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지난해 기획 전시를 진행한 바 있는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영종·용유도 지역의 유일한 독립운동이지만, 관련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며 "용유도의 만세 운동은 외부의 지원 없이 섬 주민들 스스로 실행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지금이라도 관련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