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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부평에 위치 매월 소총 4천정·탄환 70만발 등 생산
학생까지 강제동원… 헌병·경찰 삼엄한 경비 '통제'

오순환, 총독 암살 위해 창천체육회·조기회 만들어
제조법 배우려 '위장취업'… 이듬해 발각 고문 당해

황장연은 감시 심한 내부서 '고려재건당' 조직 눈길
권총·실탄 등 임정요원에 전달하려다 붙잡혀 '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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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인천 부평을 중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대규모 병참기지로 쓰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중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1941년 부평에 대규모 군수 공장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캠프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부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육군인천조병창(이하 조병창)'이다.

당시 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조병창에 들어가 무기를 밀반출하거나 무기 제조법을 빼내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독립운동가 오순환(1921~1992)과 황장연(1923~2008)이 대표적이다. 

 

군수 공장이었던 탓에 조병창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지만, 오순환과 황장연은 그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보탬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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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은 조병창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조병창 부지는 미군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캠프마켓 부지 반환을 앞둔 만큼 이제라도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공장들도 많았지만, 창고도 많았어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을 쌓아 두던 곳이죠. 안에 기차가 다녀서 가끔 물건들을 싣고 가기도 했어요."

조병창 내 병원에서 3년간 일했던 지영례(91) 할머니는 조병창에 대해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이상의 교수가 2017년 7~8월 채록한 조병창 노동자 12명의 구술과 관련 자료를 보면 조병창은 3개의 공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조병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육군은 서울과 인천의 중간에 있는 데다, 인천항에서 멀지 않고, 경인선을 이용해 곧바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부평 지역을 조병창의 부지로 선택했다. 

 

또 부평에는 일본군 제20사단이 담당하던 부평연습장이 있어서 대규모 부지를 확보하는 데 수월했던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정과 총검 2만개, 소총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軍刀) 2만개, 차량 200량을 생산했다. 1944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총 250여척의 선박과 200여개의 무전기를 제작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심지어 당시 일본 육군이 비밀리에 잠수함을 만들던 인천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관련 부품을 공급했다.

조병창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1941년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4년여 동안 조병창의 총생산액은 1억1천330만엔에 달했다. 

 

1940년 우리나라의 쌀 한 가마니(80㎏)의 가격이 22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1조300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초기 조병창에서는 공개적인 모집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았다. 공개 채용 형태로 조병창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교수 채록에 따르면 당시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집으로 돈을 부치기는커녕 오히려 집에서 (돈을) 보내줘야만 할 정도로 열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조선총독부는 '국민징용령'을 시행했다. 이때부터 조병창에선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1944년 5월 "결전비상조치요강에 기초한 제1회 학도동원이 시행돼 '경성공업(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인천중학(현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상업(현 인천고등학교)', '인천공업(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인천고여(현 인천여자고등학교)', '소화고여(현 박문여자고등학교)' 남녀생도 360명이 인천육군조병창에 입창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육군은 조병창에 강제로 끌려간 학생들에게는 월급도 주지 않았다.

조병창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는 공장이기 때문에 일본 육군 헌병대와 경찰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운영됐다. 

 

조병창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조병창에 들어가면 굴뚝에 들어간 것처럼 어딘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부분 노동자는 자신의 숙소와 작업장의 한정된 지역에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체포되거나 밖으로 추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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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軍) 노릅 파이어(Norb-Faye)가 촬영한 1948년 부평 일대의 전경. 하얀색 바탕으로 표기된 부분이 당시 건물이고, 검은 테두리 친 표기가 현재 시설이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제공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철저한 통제가 계속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진행됐다. 오순환은 독립운동을 하고자 스스로 조병창에 들어간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김승학이 1970년 발간한 '한국독립사'에서는 오순환을 1921년에 태어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서울 창천감리교회 청년회에 속해 있던 그는 회원 21명을 모아 항일 결사 단체인 '창천체육회(滄川體育會)'와 '조기회(朝起會)'를 조직했다.

창천체육회와 조기회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조선총독과 일제 고관 암살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41년 10월 함께 활동하던 김군회(1918~1963), 정은태(1921~1996) 등과 함께 조병창에 위장 취업했다. 

 

조병창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수공장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암시장을 통해 구매한 총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순환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를 한 셈이다.

안타깝게도 오순환의 계획은 이듬해 경찰에 발각됐고, 함께 잠입한 회원들과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오순환이 조병창에서 배운 기술로 실제 무기를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순환은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의 큰아들인 오세대(73)씨는 9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해방 후 철공소를 운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다"며 "조병창에서 몇 달만 일하면 충분히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매우 강직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허리통증에 시달렸지만, 항상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고 덧붙였다.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오순환뿐만이 아니다.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제작된 무기를 빼돌려 임시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인물이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그가 192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장연이 조병창에 언제 들어갔는지에 대해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가 조선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점을 보면 강제로 동원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43년 5월 황장연은 조병창에서 함께 일하던 30여명의 동료들과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한반도 내에 어느 곳보다 철저한 감시가 이뤄지는 조병창에서 그가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1944년 9월 황장연은 임시정부 요원이던 신교선과 접선해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조병창을 관리하던 일본 육군에게 발각됐고, 그는 이듬해 2월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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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환과 황장연 이외에도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인물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도 있다. 

 

재미교민단체가 발행한 '국민보'는 1945년 8월 15일 자 신문에 "군수공장 공인 100여명이 폭력단을 만들어 적의 기관을 파괴할 폭탄과 화약을 감추어 두었다가 붙잡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조병창에 강제 동원됐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은 숙소 내 화장실에 '조선 독립만세'라고 적은 종이를 붙이기도 했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부는 '일본의 전쟁을 유리하게 만드는 무기를 만들지 말자'며 쟁의행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쉽게도 조병창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본 패망 직후에는 조병창을 관리하는 일본인들이 관련 문서를 파쇄하고 본국에 돌아간 데다, 미군이 오랜 기간 그 터를 차지하고 있어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부원장은 "오순환과 황장연은 일제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던 조병창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며 "이들뿐만 아니라 조병창 내에서 활동했던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