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이후 인천, 일제강점기부터 노동운동 발달
1945년 인천자유노조 설립·46년 동양방적 '파업'
60년대 산업화속 종교계·직물공장 노동자 연대
1978년 '동일방직 똥물 사건' 전국적 집회로 번져
80년대 들어 학생운동 결합 독재항거 적극 참여
대공장연대·노활추 1995년 민주노총 설립 큰힘
지난 2017년 11월 인천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2년여에 걸친 작업이 결실을 맺었다.
이 책은 1∼5부로 나눠 1950∼1960년대, 1970년대 유신독재치하, 1980년대 전반기, 6월항쟁과 노태우정권치하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부문별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을 담았다.
인천민주화운동의 역사 가운데 노동운동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하다.
인천민주화운동사는 '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렸던 인천의 노동운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인천민주화운동사 부문별 민주화운동(제5부) 가운데 노동운동(1장)이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인천지역 노동운동을 살펴본다.
■태동기
# 항구도시 인천, 필연적이었던 노동조합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은 항구를 기반으로 한 산업도시로 변모해 갔고 공장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미업이 제염업, 양조업, 경공업 등으로 산업화가 진행됐으며 1925년에 인천공작창이 세워지며 중공업도 발전하기 시작한다.
개항장 인천은 일제강점기부터 노동운동이 발달했는데, 항구를 중심으로 부두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고, 미군유류보급창이나 부평미군기지(ASCOM)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생존권과 노동권 확보를 위해 싸웠다.
1945년 인천자유노동조합이 설립됐고 1948년 4월 인천부두노동조합이 결성됐다.
1946년 6월 8일 동양방적 인천공장에서 직공 700여명이 '8시간 노동제'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이는 일도 이때 있었다.
미군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노조가 결성되기도 했다. 인천지구 미군자유노동조합이 결성(1956년 6월)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해방 전후로 인천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소멸했고 그 자리에는 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는 상층 간부 중심의 대한노총이 자리 잡게 됐다고 책은 설명한다.
■1960s
# 빨라지는 산업화… 노동운동 확산
1960년대에 인천은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하며 노동운동의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1961년에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인권 교육과 선교를 하기 위한 조직인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조직됐고, 1965년 가톨릭노동청년회도 설립됐다.
산업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의 숫자도 급속히 증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강화도에는 강화읍을 중심으로 20여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이 존재했는데, 강화 직물공장 중 가장 큰 심도직물에서 1967년 5월14일 전국섬유노조 심도직물 분회가 설립됐다.
이들의 투쟁에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가톨릭교회가 연대했다. 개신교에서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활약했다. 이들은 노동자 소모임을 조직하고 노동교육을 실시했다.
■1970s
# 잇단 노조설립… 노동운동 본격화
1970년대 인천은 노동운동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삼원섬유 노조 설립과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이다. 1973년 12월 삼원섬유 노동자 120명은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이듬해 노조 결성에 들어갔다.
사측은 간첩이 개입된 노조 결성이라며 이를 저지했지만, 긴 투쟁 끝에 노조 설립을 이뤄냈다. 삼원섬유 노조 설립은 이후 부평4공단의 노조 결성에 큰 파급을 미쳤고, 주변 공장에서 잇따라 노조가 설립됐다.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국노총과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1978년 2월 21일 한국노총 섬유노조 산하 지부인 동일방직 노조가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감행하자 사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조합원에게 똥물을 끼얹은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후 거리로 나앉은 노동자 126명을 해고했고, 전국의 노동계가 동일방직 사건 해결을 위한 집회에 나섰다.
1971년 5월에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자동차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신진자동차 노조는 3개월 뒤 800여명의 노동자들이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에 힘을 보태던 인천 종교계도 목소리를 냈다.
1977년 8월 28일에는 답동성당 김병상 신부가 유신 철폐와 언론자유를 주장하다 구속되기도 했고, 1978년 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1980s
# 민주화운동의 씨앗 노동운동
1980년대는 점차 활발해지던 노동운동의 열기가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하던 시기였다.
박정희 서거 이후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 했지만 이듬해 5월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독재정권은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한 노동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이들이 노동현장에서 완전히 분리하려 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과 수도권 해고 노동자들은 1983년 내내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 4월에는 대한마이크로 노조가 결성됐고, 1985년 1월에는 사측의 탄압을 이겨내고 경동산업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1985년은 대우자동차와 대한마이크로 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지역 노동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특히 대우자동차 파업은 재벌 대기업 남성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대규모 투쟁으로 큰 의미가 있었고, 소위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84년 1월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인천지부(인천노협)가 결성돼 종교단체로부터 독립된 노동운동단체가 설립됐다.
인천노협 내 젊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도 결성됐다.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 운동이 성장하는 가운데 1987년 6월항쟁이 벌어졌고 인천지역 노동자들도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어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인천에 100여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됐다. 1987년에 급격히 늘어난 노동조합들은 1988년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으로 조직됐다.
■1990s~
# 현재 진행형인 노동운동
1990년대 들어서 산업재편 등으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중심의 활동은 위축된 반면 업종이나 대기업 부문의 민주노조들은 점차 힘을 키웠다.
1990년에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이 민주화되는 등 지역 내 영향력이 큰 대공장 민주노조들이 속속 들어섰다. 인천제철, 영창악기, 진도, 대우전자, 한라중공업 등의 노조들은 대공장연대모임을 결성했다.
그보다 작은 규모의 공장들도 인천지역노동조합활성화추진위원회(노활추)라는 형태로 연대해 지역 민주노조 진영을 형성했다.
인천지역 민주노조들은 인천지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인노대)를 조직하고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 큰 기여를 했다.
지난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노동운동의 고민과 논쟁은 대부분 현재도 유효한 것들이다.
노동시장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지역 노동운동의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