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과 상가의 조명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판교 테크노밸리의 야경. 밤이면 곳곳에서 투자 관련 모임이 이뤄진다. /경인일보DB

성남시, 지구단위계획으로 제한… 원룸 조성 못해

살 곳 모자란데 업무시설 계속 늘어 '악순환 반복'

■오피스 타운… 무서운 집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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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테크노밸리가 지닌 '옥에 티'는 주거다. 

 

'잠만 자는' 베드(Bed) 타운은 겨우 피했다지만 '일만 하는' 오피스(Office)타운 신세는 면치 못한 것이다.

5년째 판교에서 근무 중인 박중혁씨는 첫 입사 시기였던 2015년과 지난해 2차례에 걸쳐 원룸 전세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판교테크노밸리 주변에 원룸은 아예 없었고 조금 떨어진 정자역이나 미금역 근처도 오래된 원룸밖에 없었다.

유일한 빌라촌인 백현동에서 만난 공인중개사 김모식씨의 설명을 들으면 판교테크노밸리의 주거 실태가 쉽게 이해된다. 

 

김씨는 "백현동 카페거리에 있는 상가주택의 투룸 전세가격이 2억5천만~2억7천만원대이고 사실상 투룸만 있지, 원룸은 없다"며 "나머지 테크노밸리 인접지역이나 판교역 주변은 모두 주상복합이나 아파트 단지밖에 없어 최소 79㎡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판교신도시 내 원룸이 있는 상가주택은 전체를 통틀어 백현동의 2개 동이 전부다. 

 

성남시가 지구단위계획으로 점포주택 1개 동당 3가구까지만 평면을 구성하도록 제한하는 바람에 사실상 원룸은 조성되지 못했다. 

 

그나마 20~30대가 선호하는 상가주택의 투룸도 경쟁이 치열해 가격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고 그마저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좁은 면적의 아파트를 찾는 젊은 부부도 마땅한 집을 찾기는 쉽지 않다. 

 

봇들마을 아파트단지 주변 공인중개사 이재순씨는 "판교역과 테크노밸리에서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아파트단지 99㎡의 전세가가 6억6천만원이고 매매가는 11억원"이라며 "판교 직장인들이 집을 보러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판교테크노밸리 주거시설은 모자란 데 업무시설만 늘어나고 있다"며 "판교 부동산 시세는 계속 올라가고 직장인들은 다른 지역을 찾아가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6일 아침 판교역을 빠져나오는 젊은 직장인들. 정장을 입은 이들은 흔치 않고 대부분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다. /김금보기자 artomate@kyeongin.com

각 잡힌 정장과 구두 대신 후드티·청바지 차림
'~님'·'~프로' 직급 관계없는 수평적 호칭 사용

■슬리퍼… 그래도 '기회의 땅'


판교테크노밸리 직장인들은 다른 오피스타운 사람들과 옷차림이 다르다. 

 

H스퀘어 앞 중앙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각 잡힌 정장과 구두 대신 헐렁한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한겨울인데 슬리퍼를 신은 사람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구둣방을 하면 망한다'는 속설이 금방 이해되는 풍경이다.

여느 오피스타운이라면 한산해야 할 오전 11시, 카카오가 입주해 있는 H스퀘어 N동의 카페에 들어가니 후드티를 입은 이 회사 직원들로 북적였다. 삼삼오오 회의를 하기도 했고, 혼자 앉아 노트북과 씨름하는 사람도 많았다. 

 

후드티 차림으로 혼자 작업 중이던 '판교인'에게 물어보니 "꼭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집중이 안되면 카페로 내려와 일하기도 하고, 사내 카페나 곳곳의 오픈형 회의실에서 자유롭게 회의하고 일한다"고 말했다.

카카오뿐만 아니라 판교테크노밸리 내 대부분 기업들은 '~님', '~프로' 등 서로의 직급과 관계없이 동일한 호칭을 쓴다. 주임·대리·과장 등 수직적 직급에서 벗어나야 거리낌 없이 의견을 낼 수 있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투자심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재은 씨는 판교 기업들의 주도적이고 수평적인 문화에 매력을 느껴 5년 넘게 몸 담았던 군수회사에서 나왔다.

박 씨는 "전 직장이 정부사업을 수주한 대로 일을 추진하는 방식이었다면, 스타트업은 어떤 사업을 할지, 어떻게 성과를 올릴지 스스로 결정한다는 게 큰 차이"라며 "여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이나 동기부여는 굉장히 크다"고 말했다.

반면 아무리 수평적 기업문화가 자리잡은 판교라고 해도 '한국기업은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조영지(가명)씨는 직급과 관계없이 서로 영어 호칭을 쓰는 카카오 계열사에 근무한다. 조씨의 호칭은 '스칼렛(가명)'이다.

조씨는 "호칭이 통일되면서 직급에 상관없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된 건 맞지만, 실질적인 부분에선 여전히 직급이 우선이다. 회의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순 있지만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사실상 중요한 결정은 윗선으로부터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는 구글도 코리아가 붙으면 한국기업이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미국 구글은 진짜 자유롭지만 구글코리아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한국 기업이라는 의미"라며 웃었다.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투자자와 '홈브루 파티'
자유로운 분위기속 '연결 다리'… 제2애플 꿈꿔

■도전… 오늘도 꿈 좇는다



 

판교의 저녁은 새로운 도전과 꿈을 실현하는 기회의 장이다.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이면 세계 시가총액 2위 '애플'과 3위 '마이크로소프트'를 꿈꾸는 판교인들이 '홈브루(Homebrew) 파티'에 모인다.

홈브루 파티의 주최자는 스타트업 투자자 '액셀러레이터'. 수백억 단위의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탈(VC)과 달리 액셀러레이터는 5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의 시드(seed) 투자를 전문으로 한다. 아이디어만 가진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워가고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이다.

소규모 투자라는 특성상 액셀러레이터가 주최하는 홈브루 파티는 일렬로 자리에 앉아 딱딱한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대신, 피자와 맥주를 먹으며 자유롭고 흥겨운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액셀러레이터 회사 '컴퍼니B'는 지난해 3월부터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7층에서 홈브루 파티를 개최해왔다.

모임의 멤버는 '누구나'다. 관심만 있다면 참여할 수 있고 스타트업 대표 등이 5분간 자신의 아이템과 의견을 발표하면 투자자가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다. 여기서 추천된 아이템은 컴퍼니B의 '오피스아워'에서 최종 투자 여부가 결정된다.

오피스아워는 컴퍼니B 구성원이 투자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기구다. 액셀러레이터 컴퍼니B는 자체 자본금 투자와 더불어 조합투자 형태로 운영된다.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 자신의 출자금을 투자할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는 식이다.

컴퍼니B는 개인투자조합 3건을 결성했고 4호와 5호 결성을 준비 중이다. 32개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했고 현재 10억원의 시드투자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판교리얼리티 _ 기회

컴퍼니B의 자본금을 투입한 '자체투자'와 더불어 개인 투자자(엔젤투자자)로 구성된 '조합 투자'가 진행된다. 조합 투자자들 중에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 자신이 투자한 기업 임원으로 이직한 사례도 있다.

SK IT 계열사에 15년간 근무하던 김수경(가명)씨는 자신이 초기 투자했던 로봇소프트웨어 플랫폼 업체로 이직해 이사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IT 대기업의 서비스 기획자로 근무했지만 매너리즘에 빠졌다"며 "스타트업에서 이직한 이후 매너리즘이 해소되고 새로운 인생의 계기를 맞게 됐다"고 말했다.

홈브루 파티가 지향하는 이 같은 투자방식은 세계 최고 IT기기 제조업체 '애플'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다. 벤처투자자 마이크 마쿨라가 차고에서 컴퓨터를 만들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애플에 투자해 성장 기반을 마련해줬다.

변리사 출신인 엄정한 컴퍼니B 대표의 역할은 조합원 앞에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이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도 얼마든지 한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게 엄 대표가 꿈꾸는 홈브루 파티의 결과다.

엄 대표는 "판교는 선데이토즈나 카카오 같은 스타트업들이 국내 최정상 기업으로 성장한 곳이고, 지금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스타트업이 정말 많은 투자처"라며 "하지만 스타트업과 투자자를 이어줄 다리가 부족하고 기업 간 네트워킹이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앞으로 유기적 네트워킹이 더욱 활성화돼 지원이 이뤄진다면 판교에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탄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스타트업과 같은 벤처기업의 투자 수익률이 부동산 투자 수익률을 넘어설 정도로 벤처 투자 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된다면 한국의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탄생하는 건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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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

글: 공지영차장, 신지영, 김준석기자
사진: 임열수부장, 김금보기자
편집: 안광열차장, 장주석, 연주훈기자
그래픽: 박성현, 성옥희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