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영종·삼목·신불·용유도로 나뉘어
이어진 섬과 섬… 구읍뱃터 모여 육지로
신불도, 영종도 남서쪽 500m 거리 위치
실향민·원주민마을 분리 130여가구 살아
공항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 이들 네 개의 섬을 하나로 만들었다.
옛날 네 섬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었다. 작은 섬 마을이 하루 1천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하늘도시'로 변했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의미인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영종도와 딱 들어맞는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그 옛날 섬마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좇아가 보자.
영종도가 신공항 건설 장소로 결정된 것은 1990년이다.
육지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지만 섬과 섬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영종도와 삼목도는 도로로 연결돼 있었고, 영종도와 신불도는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도로라고 해야 좁디좁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거리가 많이 떨어진 용유도와 삼목도도 도로로 연결돼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도로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 섬 주민들이 육지로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곳은 영종도 구읍뱃터 한 곳이었다.
1968년생 이정국 씨는 영종 운남리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하늘도시로 편입돼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7일 만난 그는 영종중학교 인근 공원이 자신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건설 관련 일을 하는 그는 인천공항과 하늘도시 건설 과정에도 참여했다. 영종도가 바뀌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셈이다.
삼목도와 연결된 도로의 영종도 지역 초입 마을을 '진등'이라고 불렀다. 바다가 메워지는 바람에 마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은 다 없어졌지만, 그 연륙도로와 연결된 작은 길은 아직 남아있다.
이정국 씨는 옛 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스카이72 골프장 인근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건물로 안내했다. 이 앞을 지나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너머 보이는 작은 길이 삼목도와 연결 도로로 이어지던 곳이라고 했다.
이정국 씨는 "신라면세점 물류창고 쪽으로 쭉 다리가 있었고, 삼목도에 다다르면 양쪽으로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고 했다.
다리에서 진등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은 모두 하늘도시 3·5공구로 편입됐다.
신불도는 영종도에서 남서쪽으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돼 있는 영종 지역은 '벌미'라고 했다. 벌미와 신불도 사이는 염전이었고,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신불도와 연결된 길이 난 곳은 현재 BMW 드라이빙센터 뒤편이다. 도로 표지판에서는 옛 지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962년생인 이광만 씨가 태어난 곳은 신불도다. 지난달 30일 만난 이광만 씨는 자신이 태어난 집이 있던 위치를 현재 BMW드라이빙센터 건너라고 설명했다.
신불도는 130여 가구가 살던 작은 섬마을이었다. 90년대 초반 공항 건설로 인해 이주가 시작되기 전 신불도 주민들은 염전 종사자가 10여 가구, 나머지는 대부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주로 벼농사를 지었으며, 고구마와 감자도 심었다. 어민들은 꽃게, 새우, 숭어 등을 잡았다. 절반 정도는 집에서 먹었고, 나머지는 판매했다.
활어를 보관할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주로 말려서 먹거나 팔았다고 한다. 꽃게는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삼목도, 영종·용유 사이 주민왕래 고리
1988년 다리 개통전까지 징검다리 건너
용유女, 영종男과 결혼땐 "시집 잘갔다"
간조때 드러났던 '장군바위' 아직 그대로
삼목도 주민들도 신불도와 마찬가지로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이들 섬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정착했다.
이광만 씨는 "신불도는 작은 섬이지만 실향민이 모여 사는 곳과 원주민 마을이 분리돼 있었다"며 "실향민들이 사는 동네를 '바깥 동네', 원주민 마을을 '안 동네'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광만 씨 부친도 황해도에서 넘어온 실향민이고 '바깥 동네'에 살았다.
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돼 지난 2008년 발간한 '영종용유지'는 "전쟁 직후 영종도에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사장이 여러 곳에 있어 전쟁 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신불도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신불IC'라는 이름으로 그 자취를 안내한다.
신불도에 있던 산을 서풀산이라고 했다. 신불도의 옛 이름인 '서풀'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인천공항 건설하면서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서풀산을 깎아낸 흙과 돌을 골프장을 짓는 데 썼다.
지금도 그 산은 있는데 그 높이가 절반 정도로 낮아졌다. 이광만 씨는 "서풀산에는 다른 산보다 바위와 돌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용유도는 남쪽에 있는 무의도와 가깝지만 삼목도를 고리로 영종도와 이어져 있었다.
1935년생인 김홍일 씨는 1960~1970년대 모습이 훤히 떠오른다. 과거 영종도의 유일한 사진관이었던 '영종사진관'을 운영했던 그는 영종 지역 곳곳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김홍일 씨는 "예전에는 용유도와 삼목도는 징검다리로 건너다니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1980년대에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 징검다리는 물이 빠진 간조 때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지와는 왕래가 적다 보니 영종도 주민끼리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용유도 주민과 영종도 주민이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잦았다.
영종도가 용유도보다 컸다. 그래선지 용유도 여성이 영종도 남성과 결혼하면 "시집 잘 갔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종도(삼목도)와 용유도를 잇는 긴 다리는 1988년 개통됐다. 지금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과 제2여객터미널 사이에 있는 관제탑 부근이다.
다리는 자취를 감췄으나 다리와 연결되는 도로는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관제탑 방향으로 다리가 있었다. 지난 3일 1948년생 허재봉 씨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허재봉 씨는 "과거에는 이 일대가 전부 바다였다"며 "이 일대에서 굴 양식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재봉 씨는 "80년대만 해도 용유도 주민들이 육지에 나가 소를 팔기 위해 십여 마리씩 끌고 영종도에 온 뒤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며 "용유도 주민들은 뭍으로 나가기 위해서 영종도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농수산물을 팔기 위해 갖고 나가는 이들이 우리 집에서 많이 묵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가 바다였다는 얘기를 상상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바다에 있던 장군바위는 남아 있다. '호텔 오라'에서 공항서로를 넘으면 도로보다 지대가 낮은 부지가 나온다. 그 한가운데 7~8m 높이의 장군바위가 서 있다. 바다에 있던 이 바위는 간조 때만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허재봉 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가 서려 있어서 저 바위는 없애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이 마치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듯이 보여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입한 왜구들이 겁에 질려 침입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영종용유지'는 "공민왕 원년과 29년, 30년에 왜구들이 자연도와 덕적도 등에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그때도 용유도만은 왜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고 장군바위 설화를 전한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사진/김용국·조재현기자 y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