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목문화관·금학헌·금성관 등 읍성 역사공부 / 서성문 인근 '39-17 마중'에선 동학농민혁명 접해
'나빌레라 센터' '남도 정미소' '밀레날레 마을미술관 Ⅰ관' 등 도시재생이 낳은 문화공간들도 많아
'2천년 시간여행 나주'와 '천년목사고을 나주'라는 문구는 예로부터 남도 행정과 문화의 심장부였던 나주 역사의 깊이와 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주읍성권을 비롯해 영산포 근대문화권, 반남고분군 등 나주 볼거리는 다채롭다.
'코로나 19'를 날려버릴듯한 봄볕을 받으며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나주를 찾아 '뚜벅이' 시간여행을 떠난다.
# 나주읍성, 시간 속을 걷다
광주에서 국도 1호선을 따라 나주에 들어서면 옛 4대문중 하나인 동점문(東漸門)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던 것을 지난 2006년 9월에 복원했다.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성문 앞에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둘러친 것이 특이하다.
나주여행은 마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까마득하게 오래된 2000년 역사의 속살을 헤집는 시간여행이다.
두발로 걸어가며 나주목(牧)문화관을 비롯해 인접한 목사내아(금학헌), 금성관을 차례로 거쳐 '호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나주목문화관에서는 '나주읍성 둘러보기' 등 6개 공간을 돌아보며 나주의 역사변천과 인물, 읍성내 관청 등에 대해 상세하게 접할 수 있다. 옛 나주읍성 모습은 축소모형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웅장한 '나주목사 행렬행사' 역시 70여 명의 인물을 한지 인형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눈길을 끈다.
'금학헌'(琴鶴軒)으로 불리는 목사내아(內衙)는 나주 목사가 거처하던 살림집이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가운데 '금성관'(객사)과 '정수루'(동헌 출입문)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유명한 '학봉 김성일 방'과 '독송 유석증 방', 인·의·예·지실이 마련돼 있어 숙박을 할 수 있다.
마당에는 호두나무와 벚나무가 심어져 있다. 담장에는 '벼락 맞은 팽나무'가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금학헌을 찾은 관광객들은 기적적으로 소생한 팽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금성관(보물 제2037호)은 나주읍성 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금성관에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올렸다고 한다.
금성관 좌우 부속건물인 동익헌·서익헌은 사신이나 중앙관리들이 묵는 객사로 활용됐다.
금성관 북쪽 모퉁이에 자리한 '사매기 째깐한 박물관'은 나주여행에서 지나칠 수 없는 공간이다.
곰탕집을 운영하는 이상덕 관장이 정성스레 모은 '옛날 나주 사매기 사람들이 사용했던 귀중한 생활용품'들로 가득하다. '째깐한'은 '작다'라는 의미의 전라도 말이다.
입구에는 나주극장이 1990년대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뿌린 영화 '돌아이2'(1986년 작) 전단지가 붙어있다.
내부에는 '박물관 보물 1호'라는 타이틀을 붙인 헤어진 검정고무신과 반짇고리를 비롯해 나주곰탕을 끓일 때 사용한 '황동 가마솥'과 목화솜 무게를 잴 때 쓴 '목화 저울', 삼베를 짤 때 사용한 '부티'와 '베 바디', 대청문짝을 들어 올려 고정하는 '박쥐 들쇠', 나주 유일의 조선시대 군사 훈련교범, 가난한 나주선비가 사용했을 서안(書案)과 천자문 등 나주의 오랜 역사가 배어있는 손때 묻은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금성관에서 나주향교 까지는 500여m 거리. 거란족 침입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주로 몽진(蒙塵)한 고려시대 현종과 연관 있는 '사매기' 길을 싸목싸목 걸으며 나주 역사를 음미하기에 제격이다.
나주향교 건물배치는 앞에 제사공간을, 뒤에 학습공간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 형태이다. 대성전(보물 제 394호) 일부 벽체에 쓰인 흙은 공자 고향인 중국 산둥 성 곡부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유학을 강학하던 명륜당과 유생들이 글공부를 하며 유숙하던 서재(西齋)를 돌아본다. 500년생 비자나무 한 그루가 푸르다.
# 서성문에서 만나는 125년 전 동학의 역사
나주향교와 이웃하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에서 나주를 중심으로 한 근대사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동학 농민혁명이다.
1894년 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함락한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나주성 주변을 포위한다. 당시 농민군은 나주지역을 제외한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7월 1일부터 손화중과 최경선, 이방언, 이화진 등이 이끄는 농민군들이 나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한다.
4개 문 가운데 서성문(西城門)을 집중 공략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수차례에 걸친 총공세에도 끝내 성문을 열지 못했다.
이에 8월 13일 지도자 전봉준은 10여명의 부하를 데리고 나주성에 들어가 나주목사 민종렬을 직접 만나 '나주성을 넘기라'는 담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수성군 도통장(都統將)을 맡은 난파(蘭破) 정석진(1851~1896)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농민군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그는 해남군수에 제수된다.
이듬해 11월 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자 1896년 2월 정석진은 나주유림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러나 관군에 체포돼 남문 밖에 위치한 전라우영(全羅右營)에서 처형된다.
난파의 큰아들인 정우찬이 1915년 선친을 추모하는 뜻에서 난파정을 재건축했다.
그리고 난파의 손자인 정덕중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해 1939년에 목서원을 지었다. 한옥과 일본, 서양식을 절충해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나주의 아픈 역사를 머금은 이곳은 2017년에 전주출신 사업가 남우진씨가 한옥숙박과 공연, 전시를 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과거 쌀 창고였던 카페에서는 커피 외에 나주 배와 나주 딸기를 이용한 차를 판매한다. '39-17 마중'과 서성문은 지척이다.
# 도시재생 통해 나주 근·현대 역사 살려내
200여m 길이의 서성문 성벽 하단이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팽나무 고목을 지나 나주천을 따라가다 보면 '나빌레라 문화센터'에 닿는다.
비단실을 생산하던 전남 최대의 잠사(蠶絲)공장이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을 거쳐 문화예술 창작발전소로 탈바꿈했다.
나주시내 도시재생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11월 개관한 '남도 정미소(情味笑)'는 본래 1920년께 만들어져 나주평야에서 수확한 나락을 찧어 도정하던 곳이었다.
도시재생을 통해 정(情)과 맛(味), 웃음(笑)이 함께하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옛 금남금융조합(고조현 외과)옆에 위치한 나주 밀레날레 마을미술관Ⅰ관은 나주읍성을 무대로 펼쳐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2016년 처음 열린 '밀레날레'는 1천년을 의미하는 '밀레'(Mille)와 '비엔날레'(Biennale)를 합쳐 만든 말로, '천년에 한번 열리는 행사'를 의미한다. '우리네 야그(이야기) 좀 들어보소'(김연희 작가)를 포함해 22개의 작품들이 시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얘기(이야기) 보따리'에 와서 '얘기 곳간' 열쇠를 꺼내요. 번호 키를 가지고 가서 그 번호 문을 열면 얘기 거리가 나오고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 얘기를 나누는 거죠."
이진나 마을미술 해설사의 설명이다.
벽에는 책보에 잘 싸인 70여개의 '얘기 보따리'가 부착돼 있다. 방문자는 많은 보자기 가운데 하나를 마음대로 고른다.
보자기를 풀어보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열쇠가 나온다. 직접 해보니 인문학자와 미술작가가 함께 만들었다는 '자미산 할미바위' 이야기 자료가 나왔다.
'밀레날레' 작품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읍성여행도 좋을 듯싶다.
광주일보/글·사진=송기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