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세 2천원짜리 단칸방 신혼살림… 가난해서 부자얘기 잘 못 풀어
늦은 나이 데뷔… 딸들과 약속했던 '통닭' 작품속 단골소재로 활용
전국 대본소 휩쓸었지만… 일본만화 개방 영향 쇠퇴·스토리 고갈도
날카로운 눈매 캐릭터로 선회 웹툰 공략… 왕성한 작품활동 이어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곳은 상상의 놀이터였다. '공부를 언제 하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이걸 언제 다 읽지'에 대한 고민만 있었다.
만화가게와 오락실 다니는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엄마들의 성화는 아이들의 문화 욕구를 막을 수 없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작품을 쏟아내던 대본소 시스템에서 불청객시리즈의 고행석(73) 화백은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신의 아들' 박봉성(작고) 화백과 함께 3대 작가로 통했다.
이현세의 '오혜성', 박봉성의 '최강타', 고행석의 주인공 '구영탄'은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인기를 누렸다.
꺼벙한 눈에 왜소한 체구인 영탄이는 볼품없었다. 늘 가난했고 배가 고팠다. 행동거지도 엉뚱해서 어떤 작품은 실수만 연발하다가 끝나기도 했다.
당시 청소년들은 그런 영탄이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소년 고행석은 엉뚱했다. 다들 대통령이나 의사, 과학자 등을 장래희망으로 적어내던 여수서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하필 만화가가 되려느냐고 선생님이 묻자 그는 "돈을 많이 번답니다"라고 답해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탐탁지 않아 했다. 목재판매업을 하던 선친은 고등학생이던 그에게 방과 후 목재상 일을 보게 했다. 가업을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손님이 없을 때가 그림 그리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스물여섯 살에 무작정 최경 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문하생에 입문해 허드렛일을 감내하는 걸 고려하면 늦은 나이였다.
화실은 김포공항 뒤쪽 서울 강서구 오쇠동 무허가촌에 있었다. 문하생 생활 몇 달 후에는 고향에 있던 애인을 불러 월세 2천원짜리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고 화백은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집이었는데 내 작품에 이런 방이 많이 등장하는 건 다 그 시절 얘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작품에서 부자들 얘기를 잘 못 풀었어. 워낙 가난하게 살았으니까"라고 읊조리듯 기억을 더듬었다.
최 선생 문하생으로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두통이' 시리즈로 명성이 높은 박기준 선생 화실로 옮겼다. '독고탁' 고(故) 이상무 화백 등이 거쳐 간 곳이었다. 강서구 단칸방과 퇴계로 대한극장 인근 화실을 오가는 동안 데뷔는 기약이 없었으나 두 딸을 보며 출퇴근하는 게 행복이었다.

오랜 수련 끝에 1981년 데뷔 기회가 왔다. 사회적인 나이 개념이 훨씬 빨랐던 때라 데뷔작가로는 매우 늦은 시기였다.
두 달간 밤잠을 설쳐 작업해 '아빠 아빠 우리 아빠'를 완성했다. 출판사에 판매만 되면 대본소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 화백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향하던 날 배웅하는 딸들에게 '아빠가 이거 팔아 통닭 사올게'라고 약속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출판사 사장은 "실력 있는 사람들은 다 젊어서 데뷔하는데 이런 나이에 데뷔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핀잔을 줬다.
출판사에서 거절당해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참새처럼 기다리던 딸들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훗날 통닭은 그의 작품에 단골 소품이 됐다.
순탄치 않은 데뷔 얼마 후 그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표현한 고통이 덮쳤다. 버거씨병이라 불리는 폐색성 혈전혈관염이 발병한 것이다. 피가 안 통해 손끝과 발끝이 서서히 썩어들어갔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예고 없이 발현돼 비명을 질러댔다.
처음에는 하루 한두 번 통증이 오더니 빈도가 늘고 시간도 길어졌다. 약을 찾아 전국을 다녀도 소용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경쇠약까지 얻었다. 대학병원에서는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루는 병상에 누워있는데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무릎에 선을 그으며 제자들에게 설명만 하기에 그 길로 병원에서 나와버렸다.
그렇게 3년을 고생하던 중 신문 하단의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글씨로 '말초혈관장애에 좋은 약'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없어진 제약회사의 은행잎 성분 약을 먹자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졌다.
고 화백은 "그때 마흔 살까지 사는 게 소원이었기 때문에 나이 60이 됐을 때 굉장히 기뻤다. 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버텼던 것 같다"며 안도했다.

병마를 딛고 일어선 고 화백은 1984년 '요절복통 불청객'을 내놓으며 전성기의 서막을 연다. 구영탄과 그의 영원한 연인 박은하를 내세운 독보적인 캐릭터와 불청객 브랜드는 전국 1만6천여개 대본소를 휩쓸었다.
고 화백이 열아홉 살 설정으로 탄생시킨 영탄이는 잘난 척을 해도 바보처럼 잘난 척해서 전혀 잘나 보이지가 않았다. 너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난한 와중에도 비관하는 법이 없었다.
사랑하는 은하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그녀의 결혼식 기념사진에서 목격되고, 은하의 집 앞 전신주 위에 올라가 통신선을 절단해서는 혼자만 그녀를 바라보며 통화하는 등 돈키호테같은 매력도 있었다.
고 화백은 "내 만화를 보고 돌아서서 사람들의 마음이 행복해지길 원했다"며 "목숨을 끊으려고 갈등하는 사람도 영탄이를 보면 '에이 그냥 대충 살지 뭐'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탄이는 스포츠에도 능했다. '해와 달'(축구), '폭풍 열차'(복싱), '전설의 야구왕' 등 간판 작품도 스포츠를 소재로 했고, 88서울올림픽 직전 발표한 '스포츠 가족'에서는 아예 만능 천재스포츠맨으로 그려졌다.
고 화백은 꾸준히 스포츠 규칙을 공부하고 선수 심리상태를 알기 위해 스파링까지 했다.
공장식 대본소 시스템은 1990년대 중후반 일본만화의 개방과 맞물려 급격히 쇠퇴한다.
다작에 따른 스토리 고갈도 심각했다. 국내에 대본소 작가가 스물두 명 남았을 때 '고행석'의 판매 순위는 21위까지 떨어졌다.
이런 가운데 모 작가가 영탄이의 눈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해당 작가가 꺼벙한 눈의 대명사가 된 게 불청객 시리즈 소멸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이후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선회한 액션 위주의 '악질' 시리즈를 다수 선보이며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요즘은 웹툰에 진출하기 위해 캐릭터를 개발하고 있다.
고 화백은 "항상 여유 없이 쫓기듯 일을 하다 보니 세월이 갔다"며 수줍게 웃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면서 고 화백의 과거 대표작이 빽빽하게 채워진 진열대를 보니 대본소에서 신작을 마주했을 때의 벅참이 다시금 올라왔다.
불청객시리즈를 이불 옆에 쌓아두고 정신없이 정주행하던 아이들은 중년이 되어 고단한 일터로, 가정으로, 아득한 세월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옛날 불청객을 이제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치 않다. 영탄이는 지금도 빛바랜 어느 골목 귀퉁이에서 꺼벙한 눈을 들이밀고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고행석 화백은?
▲1948년 전남 광양 출생
▲1973년 최경 선생 문하생
▲1974년 박기준 선생 문하생
▲1981년 데뷔작 '아빠 아빠 우리 아빠'
▲1984년 '요절 복통 불청객'
▲1985년 '해와 달'
▲1986년 '폭설속의 불청객'
▲1988년 '굴뚝새'
▲1988년 '스포츠 가족'
▲1989년 '폭풍 열차'
▲1992년 '전설의 야구왕'
▲1993년 '마법사의 아들 코리'(애니메이션화)
▲2000년 '악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