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항로 역사'
1929년 첫 항로 대구~서울~평양~신의주
1971년 국내 항공사 첫 미주 노선권 확보
'인천' 153도시 취항… 2030년 300곳 목표
'5·24조치'후 北 영공통과 막혀 우회해야
도착 공항의 활주로 품에 무사히 안기기 전까지 비행기는 보이지 않는 하늘길을 따라 날아야 한다.
도로가 필요한 자동차, 철길이 있어야 하는 기차와 달리 비행기는 하늘을 자유롭게 떠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비행기도 국제 협약과 나라별 국내법에 따라 반드시 정해진 길로만 다녀야 한다. 특히 남북 대치 상태에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군사적 이유에서 더더욱 그렇다.
한국항공협회 항공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정기 항로는 1929년 4월 1일 일본이 도쿄와 중국 다롄 간 항로를 만들면서 중간 기착지로 둔 대구~서울~평양~신의주 노선이다.
그해 6월 21일 서울~울산 단독 노선이 개설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개설한 정기 항로는 1936년 10월 신용욱이 설립한 조선항공사업사의 서울~이리 노선이다.
대한항공이 본격적으로 민영항공시대를 열었던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국제 정기 항로는 일본 노선 3개와 방콕, 홍콩 등 아시아 항로가 전부였다.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주 항로는 1949년 맺은 한미항공협정에 따라 미국 항공사들이 독점했고, 유럽 노선도 없었다.
1969년 한진이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설립한 대한항공은 미국 진출을 위해 정부에 한미항공협정의 개정을 건의했고, 미국이 우리 정부의 협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항로 개설의 물꼬가 텄다.
1971년 3월 26일 호놀룰루를 거쳐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노선권을 우리 정부가 확보했다. 이듬해 4월 19일 대한항공은 서울~도쿄~호놀룰루~로스앤젤레스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이어 1979년 뉴욕 노선을 취항했고, 미국 전역으로 항로를 개척해 나갔다. 대한항공은 동시에 유럽 항로 개설에도 적극 나서 1973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스위스 취리히(197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197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1980년)를 취항했다.
대한항공 50년사를 보면 7개 도시에 불과했던 국제선 취항지는 10년여 만인 1979년 15개국 20개 도시로 늘어났다.
# 1983년 9월 1일 '격추'
미·소대립기, KE007편 소련영공 침범
사할린 상공서 미사일 269명 전원 사망
관성항법장치 오작동 '경로 이탈' 추정
美, 군용기술 공개… 오늘날 널리 활용
미주 항로는 미국과 소련이 극렬히 대립하던 냉전 시기에 탄생했다.
서울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가려면 러시아 영공을 지나는 게 최단 거리 노선이었는데 당시 소련이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우회 항로를 이용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발 대한항공 여객기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에 격추당하는 비극적 참사가 발생했다.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KAL기 격추 사건이다.
승객과 승무원 269명을 태우고 1983년 8월 31일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KE007편은 다음날 오전 6시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앵커리지에 기착했다가 서울을 향해 비행하던 KE007편은 9월 1일 새벽 3시 26분 교신이 끊겼고,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항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도상에 미리 찍어둔 점과 점을 서로 연결한 길이다.
비행기는 이 점을 지나가며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이런 하늘 위의 무수히 많은 점을 '웨이포인트(Waypoint)'라고 하는데 1947년 설립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정한 위도와 경도로 이뤄진 특정 좌표다.
비행기는 관제사와 의무적으로 웨이포인트를 통해 항공기 위치 정보를 교신한다.
KE007편은 알래스카에서 출발해 소련의 캄차카 반도 남쪽 해상에 있는 웨이포인트를 따라 비행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정상 항로에서 북쪽으로 100마일(160㎞)이나 떨어진 캄차카 반도 부근의 소련 영공을 통과해버렸다.
사할린 상공까지 뒤따라온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 2방에 민항기는 산산조각 나 바다로 추락했다.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한 참담한 사건이었다.
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로 위치를 파악해 이동하는 자동항법기술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가속도와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을 이용해 위치를 0.01초 마다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관성항법장치의 오작동으로 항로를 이탈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비무장 민항기 격추와 관련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격추 사건을 계기로 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군사용으로 개발해 활용하던 GPS(위성항법장치)를 민간에 개방하기로 했다.
GPS는 위성과 수신기로 좌표를 구하는 방식이다. 냉전의 희생양이 된 우리 국적기는 GPS의 민간 도입을 불러왔고, 지금은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없어서는 안 될 기술이 됐다.
관성항법장치는 오차 누적으로 항로를 이탈할 우려가 있지만, GPS는 전파교란에 취약하기 때문에 비행기에서는 두 기술이 모두 활용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로 미·소 갈등이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1989년 소련 영공 통과가 허용됐고, 1995년부터는 중국과 몽골의 영공도 개방됐다. 그런데 냉전이 종식되고 한참이 지나고도 아직 막혀있는 하늘길이 있다. 바로 남과 북의 항로다.
남북은 2007년 10·4 선언으로 백두산 관광에 합의하고, 서울(김포공항)과 백두산(삼지연공항)의 직항로 개설을 추진하기로 했으나 보수 정권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중단돼 있는 상태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남북이 다시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었고, 그해 11월 북한이 먼저 항공실무회담을 열어 영공 통과 등 신규 항로 개설에 대한 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남북 정기 직항로만 없었을 뿐 남한의 비행기가 내륙을 제외한 북측 해상의 영공을 통과하는 무착륙 비행은 가능했었는데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단행된 5·24 조치로 이 길마저도 가로막혔다.
이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해 시간과 연료를 허비하고 있다.
영공을 통과하려면 해당 국가에 통과료를 내야 하는데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첨예했던 지난해 우리 국적기가 일본에 지불하는 영공통과료가 과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6월까지 대한항공 등 9개 국적 항공사가 일본에 지급한 영공통과료는 2천126억원이었다.
반대로 일본 항공사가 우리나라에 낸 통과료는 82억2천만원에 불과했다.
남북은 서해와 동해에 항로를 개설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협의했는데 급변하는 남북 분위기 탓에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북한에 지불해야 하는 영공통과료가 유엔의 대북 제재를 위반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남북 직항로는 남북 대화나 스포츠 이벤트, 문화공연 등 단발성 교류 사업과 이벤트 때마다 깜짝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남한에서 평양을 가려면 일단 중국을 들렀다가 북한 고려항공으로 갈아타야 한다.
2000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의 첫 평양 직항로 주인공은 1973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스웨덴의 총리였다. 2000년 5월 3일 당시 방북 중이던 스웨덴 페르손 총리 일행을 태운 특별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서해항로를 거쳐 인천공항에 들어왔다.
2001년에는 평양에서 열리는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는 소설가 황석영 등 방북단 394명이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순안공항을 향한 적이 있었다.
2005년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이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의 북측 선수단·응원단 참가를 논의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찾기도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북한 선수단도 인천공항으로 입국했고, 2018년 2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찾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시는 남북 평화시대를 대비해 인천공항을 대북 교류 거점공항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은 지난해 기준 153개 도시를 취항하고 있다. 아시아가 106개로 가장 많고, 유럽 25개, 북미 15개 순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2030년까지 비아시아권 도시 100개를 포함해 총 300개 취항도시를 목표로 항공 네트워크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올해는 예기치 않게 불어닥친 코로나19 여파로 하늘길이 굳게 닫혀 있는 상태다.
전 세계 국가의 국내선 중 승객을 가장 많이 실어나르는 항로는 다름 아닌 한국의 김포~제주노선이다. 국제 항공운송정보 사이트인 OAG(Official Airline Guide)가 지난달 23일 발간한 '가장 바쁜 경로 2020(Busiest routes 2020)'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김포~제주 노선은 좌석수 기준으로 1천742만6천873명이 이용했다.
이는 하루 평균 4만8천명에 달한다. 2위는 삿포로~도쿄(1천249만명), 3위는 후쿠오카~도쿄(1천140만명) 노선이다. 국제선 1위는 홍콩~타이페이 노선으로 796만명이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국제노선 10개 가운데 인천공항이 포함된 노선은 5개나 된다.
홍콩~인천, 다낭~인천, 인천~타이페이, 인천~오사카, 인천~도쿄(나리타)는 8~9개 국내외 항공사가 정기 항로를 개설해 운항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인천~도쿄의 운항 횟수는 연 1만4천828회나 된다.
세계에서 가장 긴 국제 항로는 미국 오하이오주 뉴어크와 싱가포르를 잇는 노선으로 8천277마일(1만3천320㎞)이다. 가장 짧은 국제항로는 콩고공화국 브리자빌~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노선으로 겨우 13마일(20.9㎞)에 불과하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