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큰기사 뿌리산업 남동공단 제니스텍
금형기업 '제니스텍' 오금옥 대표.

#오금옥 금형기업 제니스텍 대표

대기업 인건비 싼 중국이전 여파 일본行
검수때 자존심 상해 이 악물고 수주받아
타협없는 현지서 "품질만이 살길" 깨달아

#이재동 표면처리 동명금속 대표

건축업 실패후 도금공장서 '제2의 인생'
갑을계약 안해… 단가에 '기술력' 책정
"대신 끊임없이 연구개발" 매출로 결실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고 청년을 독려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유효하지만 오금옥 제니스텍 대표가 진로를 고민하던 1970년대만큼 기술이 존중받던 때는 또 없었다.

오 대표가 기술자로 산 세월은 자그마치 46년이다. 1974년 1월, 고향 선배를 따라 인천 서구의 작은 금형 공장에 취직했다.

 

"공무원을 해볼까 하고 학원도 좀 다녔고, 철도청 기관사를 준비해볼까 고민도 좀 했어요. 근데 당시만 해도 공무원 월급이란 게 너무 적기도 했고, 다들 기술 배우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하고. 뿌리산업이 당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어요."

오 대표는 처음 다닌 직장에서 귀이개, 족집게 등 생활 잡기를 금형 작업으로 제작하는 일을 배웠다. 

 

지금은 기술 발전으로 다양한 기계가 제작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주변에 널린, 아주 흔한 제품이지만 손기술을 발휘해 미세한 작업을 해야 했다.

이후 자동차 전장 부품 등을 만드는 인천 부평의 큰 금형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감이 너무 많아 철야 작업을 수도 없이 해야 했다. 

 

"3일 연속 밤을 새워서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우리 같은 금형 기술자들에게 돈도 많이 주고, 정말 많이 일한 날에는 부서 회식비로 100만원을 받기도 했으니까." 

 

금형공장 월급날이면, 공장 앞 거리는 물건을 팔려는 노점들로 줄을 이었고 식당, 술집 할 것 없이 월급 탄 기술자들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때 우리들 월급이 공무원의 2배가 넘었으니까. 워낙 잔업이 많아 야근을 많이 하니, 월급이 좋을 수밖에요."

하지만 뿌리산업 기술자들이 '산업역군'으로 인정받던 20세기가 저물었다. 그 사이 IMF 사태가 터졌고 한국 경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종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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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처리 기업 '동명금속' 이재동 대표.

화성에서 표면처리(도금) 기업을 운영하는 이재동 동명금속 대표는 뿌리산업이 조금씩 하락세로 접어든 이 시기에 오히려 도전장을 내밀었다. 

 

1998년 건축업을 하다 IMF를 맞으며 사업이 망했다. 방황하던 찰나 가족이 다니던 도금공장의 일을 도와주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표면처리 공정이 제품의 완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현장에서 배우며 이 기술에 완전히 매료됐다. 

 

"눈이 확 돌아갔다고 말하면 될까. 건물의 뼈대역할을 하는 철근도 도금을 해야 더 오래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요. 철근에 녹이 발생하면 콘크리트가 터져버릴 수 있으니. 이런 걸 알고 나니, 이건 안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가 뿌리산업에 도전하던 시기는 IMF(외환위기)를 지나 국내 대기업들이 하나 둘 생산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던 2000년대 초중반이다. 

 

21세기가 시작된 후 값싼 노동력이 기업경영의 최우선 가치가 됐고, 기술로 먹고 사는 일이 '기름밥'으로 천대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도 이와 맞물린다.

경인지역 내 뿌리기업들이 하나 둘 원청인 대기업을 따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그 사이 20세기 한국 제조업의 신화를 이룩한 뿌리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평생 기술로 번 돈을 투자해 치킨집, 호프집, 빵집 등을 차렸다.

그래도 기술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제니스텍 오 대표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2005년 일하던 회사가 대기업을 따라 중국으로 전부 이전했죠. 기술력이 높아진 우리를 고용하기엔 인건비, 가공비가 너무 올랐대요. 당시 중국인은 우리의 3분의1 가격이면 쓸 수 있으니까. 다들 떠나는데, 나는 이때까지 기술자라는 자부심으로 살았거든요. 마침 사장이 설비를 모두 두고 간다기에, 인수받아 내 공장을 차렸죠."


오 대표는 평생 갈고 닦은 금형기술을 앞세워 그만의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단가 후려치기에만 익숙한 국내 대기업 대신, 기술력을 인정하는 해외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일본이었다. 

 

"처음엔 기계와 기술만 있으면 먹고는 살 줄 알았는데, 능력이 있으면 뭐해요. 일을 안 주는데…. 차라리 대기업 말고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고 생각했죠. 중소기업청에 수출초보기업을 지원하는 사업에도 지원해봤는데, 기준에 부합이 안된다며 떨어졌죠. 고민 끝에 일본에 지사를 설립하는 사업을 신청해 일본 사업을 시작했어요."

일본은 아직 전통적인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금형기업을 운영하는 곳이 많다. 그만큼 기술력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커서다. 

 

오 대표는 처음 일본기업에 납품하던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엄청 꼼꼼하게 검수해요.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새 금형작업을 했는데, 제품 특성도 모른 채 작업을 하다보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무척 자존심이 상했어요. 내가 금형 일을 이만큼이나 했는데, 일본애들한테 밀릴 수가 있나. 다시 밤새 수작업을 해서 보냈고 다음 수주를 또 받았을 땐 이 악물고 했죠. 자존심을 살려야 했으니까. 결국 1차에 문제가 됐던 부분들이 2차 수주에선 단번에 오케이를 받았죠." 

 

일본사람을 만족시키니, 그는 기술자로서 자부심이 들었다. "국내는 좀 불량이 나도 이번엔 좀 눈감고 다음에 더 잘해줄 게 라는 식의 타협이 됐는데, 일본은 품질에 있어선 절대 타협이 없었어요. 나도 그때부터 완전히 생각을 바꿨어요. 기술 품질만이 살길이라고."

오 대표의 생각은 대한민국 땅에서 뿌리산업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과 같다. 동명금속 이 대표의 경영철학도 기술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대기업들이 우리 공정에 대해 하청을 줄 때 기술력은 단가에 넣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 기술의 가격을 책정합니다. 원청에서 부른 값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값을 말해요. 애초에 갑을계약을 안합니다. 상생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도 같이 하는 거죠. 우리 회사가 주로 고가의 의료기기 도금작업을 하는데, 제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어와도 내가 도금을 잘 해서 부착시켜줘야 세상에 나올 수 있거든요. 대신 나는 밤을 새서 기술을 연구해요. 남들이 하기 어려운 작업을 다 해주니까 결국 기술력 있는 곳에 오더라구요." 

 

직원 9명, 그 역시 작업복을 입고 직원들과 땀 흘려 일한다. 경기가 날로 악화돼 모두가 울상을 지었던 지난해도 창립 이래 꺾인 적 없이 매출 11억2천여만원을 달성했다. 

 

코로나19로 긴장하고 있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 기술이 있고 뿌리산업은 결코 죽지 않을테니까. 

 

"가장 기초가 되는 공정이면서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해 성과를 내야 하는 산업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구요."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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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

글 : 공지영차장, 김태양, 이여진기자
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
편집 : 김영준, 안광열, 박준영차장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