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일제가 대륙 침략위해 세운 무기 제조 공장
해방 후 남측에 주둔한 미군이 접수·보급기지 사용
3천여 근로자·기지촌 주변 등 지역 경제 한축 형성
1990년대 시작된 반환 운동… 지난해 말 결실 이뤄
인천시, 끈질긴 협상으로 일부 개방·시설 설치 승인
10월 15일 첫선… 주민 참여공간 조성·활용안 모색
80년 넘도록 금단의 땅이었던 인천 부평미군기지 '캠프마켓(Camp Market)'이 오는 10월이면 시민에게 개방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 인천시는 주한미군사령부, 국방부(주한미군기지이전사업단)와 끈질긴 협상을 벌여 지난 7월 일부 개방과 관련한 시설물 설치 승인을 얻어냈고, 10월 중 시민 공개를 추진하기로 했다.
캠프마켓은 1939년부터 일본 육군의 무기공장인 조병창으로 사용됐다가 해방 이후부터 미군기지로 활용돼 왔다. 인천시는 시민의 날(10월 15일)에 맞춰 캠프마켓에서 시설 개방 기념식을 열고, 남측 야구장 일대 4만2천㎡를 일반 시민에 개방할 예정이다.
캠프마켓의 역사는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1939년 부평에 세운 무기 제조공장이었던 조병창에서 시작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은 한국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무기 제조와 군수물자, 강제동원 등이 본국 환경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평은 서울과 인천항을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중간 지점이었고, 드넓은 평야여서 군수기지를 짓기에 제격이었다.
조병창에서는 매달 소총 4천 정과 총검 2만 정, 소총탄환 70만 발, 포탄 3만 발, 차량 200대가 생산됐다. 성인은 물론 어린 아이와 여성까지 강제동원됐다. 조병창에는 중국 송·원·명대 제작된 철제 범종도 있었는데 일제가 중국에서 약탈해 가져와 녹여 군수물자로 활용하려다 패망 후 버리고 간 것이다.
지금은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일제가 1945년 항복한 이후 한반도 남쪽에 주둔한 미군은 조병창을 접수해 군수보급기지로 활용했다. 애초에 조병창이 없었더라면 부평이 미군에 점령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일제와 마찬가지로 서울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부평을 제24군단 예하의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로 편성했다. 일명 애스컴(ASCOM)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남한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미군 물자들이 모여들었다. 전국의 미군기지로 이 물품을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금속을 녹이던 주물공장은 최근까지도 미군의 창고용 건물로 사용되는 등 일제 강점기에 건립된 건물들도 현재 캠프마켓 안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애스컴 주변으로는 보급창과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등 수십개의 단위 부대가 주둔하며 하나의 도시(애스컴 시티)를 이뤘다.
북쪽의 GM부평공장 일부에서부터 남쪽의 부평 서중학교까지, 서쪽의 3보급단 부근에서부터 동쪽의 부평 동초등학교, 뒤편의 백조주상복합아파트 주변에 이르기까지 애스컴 시티는 거대한 규모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부영공원은 6·25전쟁 당시 애스컴 시티 안에 있던 반공 포로수용소이기도 했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여러 일자리가 생기기도 했다. 부평미군기지에서 근무한 한국인 노무자의 조합원은 3천여명에 달했다. 또 기지촌을 중심으로 술집과 클럽, 미용실, 세탁소 등이 들어섰고, 미군기지가 부평의 큰 경제축이 됐다.
애스컴시티 PX의 물건은 여러 경로로 빠져나와 일명 양키시장에 흘러나왔다. 동인천 양키시장, 서울남대문시장 등지에는 군복과 군화와 전투식량, 담배, 생활용품이 사고 팔렸다. 일명 '양공주'라 불리는 여성들은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기도 했다. 한국 여성과 미군과의 만남으로 버려진 혼혈아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평미군기지에는 빵공장이 있는 '캠프마켓'을 비롯해 '캠프하이예스', '캠프그란트', '캠프타일러', '캠프해리슨' 등이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 용산이나 평택 등지로 이전했고, 부평에는 캠프마켓만 남았다. 전국 주한미군이 먹는 빵을 생산하는 기능을 했다.
미군기지가 떠난 자리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미군기지 규모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산업도 쇠퇴했고, 부평의 생활·경제·문화도 바뀌게 됐다.

부평 미군기지 반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199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일기 시작했다.
미군기지의 축소에도 캠프마켓은 여전히 금단의 땅이었다. 1996년에는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이 부평 미군기지를 둘러싸는 '인간 띠 잇기 대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경찰의 해산으로 무산됐으나 참가자 64명이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해 부평미군기지 문제는 오히려 인천의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후 인천지역 34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우리땅 부평미군기지 되찾기 및 시민공원조성을 위한 인천시민회의'가 공식 발족해 반환운동이 본격 시작됐다. 시민회의는 캠프마켓 앞에서 매주 토요일 집회를 열었고, 4개월 만에 5만명의 서명자를 확보하는 등 시민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2019년 12월 11일 캠프마켓은 인천시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80여년의 긴 장벽을 깨고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정부는 인천 캠프마켓을 비롯한 원주의 캠프이글, 캠프롱, 동두천 캠프호비 등 4개 주한미군기지 반환을 공식 발표했다.
반환은 2단계로 이뤄지는데 1단계 반환부지는 전체 44만㎡ 가운데 21만㎡인 미군기지 북측, 남측 구역이다. 중간 지점의 나머지 2단계 반환부지는 제빵공장이 있는 자리로 올해 안으로 반환이 이뤄질 예정이다. → 위치도 참조

인천시는 1단계 반환부지 중 남측에 있는 공여구역 중 일부를 이번 시민의 날을 맞아 10월 개방하기로 했다. 환경정화에 지장이 없는 야구장 일원 4만2천㎡ 부지다.
인천시는 캠프마켓 남측 야구장 부지에 주민참여공간을 만들어 캠프마켓의 정보를 공유하고 시민의견을 자유롭게 수렴할 수 있는 장소로 조성할 계획이다.
매달 1차례 시민 투어와 전문가 및 시민토론으로 이어지는 라운드 테이블을 열어 캠프마켓 활용방안에 대한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토론하기로 했다. 인천시는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2021년까지 지구단위계획을 변경해 구체적인 활용 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또 지난 80년의 역사를 기록화하는 '캠프마켓 아카이브'를 진행해 일제 조병창에서 주한미군기지로 이어진 역사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일제 조병창 시절의 사진, 영상, 그 시절의 이야기 등을 엮어내고, 미8군사령부 주둔부터 현재의 캠프마켓으로 이어진 역사까지 자료를 구축하고 발간해 미래세대가 우리의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할 예정이다.
한편 인천시립박물관은 캠프마켓의 전신이었던 조병창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회를 인천도시역사관에서 오는 11월 1일까지 개최한다. 쇳물로 녹아 일본군의 무기가 될 뻔한 중국 철제 범종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