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c) 이천희2
성남시가 최근 도시 생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광주대단지사건을 재조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서 사건을 최초 기록한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작가 윤흥길이 새삼 재조명받고 있다.

여중생 어두운 얼굴 통해 실마리 포착
교편 내려놓은후 집필 착수

당사자에 감정 이입
거리두기 과정 권기용 등 캐릭터 입체성 높여

도시빈민운동 주목·교과서에도
"시민 문제의식 과거 병폐 반복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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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사는 현재가 된다. 1977년 윤흥길(79)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이하 '아홉 켤레')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광주대단지사건'이 그렇다.

최근 성남시가 시 생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광주대단지사건을 재조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서 성남 지역 예술가들이 '아홉 켤레'를 소재로 뮤지컬과 미술작품 등을 속속 내놓고 있다.

윤 작가는 "폭동으로 일축되던 광주대단지사건이 49년 만에 재조명되다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지난 1971년 8월 10일 성남시 수정·중원구(당시 광주군 중부면)에서 일어난 강제 이주 반대 집회다.

박정희 정부의 졸속 행정에 반발한 주민 수만 명이 대규모 집회를 벌여 정부 입장의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당시 언론은 '정부의 강압적 행정'이란 본질을 누락하고 '단순 폭동'으로만 규정했다.

윤흥길-2
1970년대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 관련 언론 보도.

작가는 이 사건의 최초 기록자다. 그는 "흔히들 내가 사건에 직접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언론 보도로 사건을 처음 접했다"고 털어놨다.

지인의 소개로 1973년 성남 숭신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사건의 실마리를 포착했다. 그는 당시 담임을 맡았던 여중생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보고 이 지역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사건 조사는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성남 현지인 위주였던 여중생들은 외지인 위주였던 여고생들에 비해 유달리 어둡고 소심했다. 2년간 가정 방문 등을 하며 그들에게 그림자가 드리운 이유를 알려 했지만 모두 나를 경계한 나머지 묵묵부답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답답해 하던 그에게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예비군훈련장에서 광주대단지사건 당사자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이후 작가는 이 청년과 술자리를 가지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된다. 그는 교편을 내려놓고 소설 '아홉 켤레' 집필에 착수해 1977년 세상에 내놓는다. 전업 작가로서 첫 작품이었다.

윤 작가는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으로 정보기관에 연행되는 등 시대적 상황이 엄중해도 자기 검열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이 큰 문제임을 직감했지만 소설 외의 수단으로 사건을 폭로하는 건 작가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 사건 당사자를 만나 보고 들은 것을 리얼리즘 소설로 정교하게 가공했다.

피해자들의 빈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소설에서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뒤집어진 트럭에서 참외가 진흙탕에 대거 굴러떨어지는데 시위에 참여한 주민들이 벌떼처럼 달려가 참외를 주워 먹는 장면이 그것이다.

특히 소설은 순박한 시민이었던 권기용이 왜 폭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밝히는 대목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의 전말을 서술하며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까지 수행해 낸다.

윤 작가는 "성남에 거주하는 동안 만난 모든 사람이 '아홉 켤레'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지워 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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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 광주대단지.

또 작가는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데 중점을 뒀다.

소설에서 광주대단지사건 피해자 권기용을 지켜보며 그의 변화를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인물인 '오 선생'이 지성인이라 자부하지만 속물근성에 가득 찬 캐릭터로 설정된 건 이 때문이다.

아내의 병환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권씨가 이웃 오 선생을 상대로 강도짓을 저지르며 내뱉는 명대사 "이래 봬도 나 대학 나온 사람이오"도 철저한 구상 끝에 만들어졌다.

그는 "당사자에게 감정을 이입했다가 거리 두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며 "그래야만 작품이 의도했던 바를 정확히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적중해 '아홉 켤레'는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손학규, 김문수 등 유력 정치인이 광주대단지사건을 계기로 도시빈민운동에 투신해 정치에 입문했다.

소설은 작품성도 인정받아 출간 당해 작가에게 한국문학작가상을 안겼고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러나 49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지난 2016년 성남시가 '광주대단지사건 실태조사 및 성남시민 명예회복에 관한 조례안'을 상정했지만 상위법과 상충한다는 이유로 시의회에서 부결됐다.

이후 성남시는 지자체 소관 안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을 재조사할 수 있도록 조례안을 대폭 수정해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사건의 본질을 재규정해 연내 광주대단지사건에 새 이름을 붙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윤 작가는 "병은 드러내야 치유된다"며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혀 반면교사로 삼아서 성남시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소설은 최근 예술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동시대성을 과시하고 있다. 최근 성남지역 예술가들은 광주대단지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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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사건 당시 구속된 시민 22명의 아픔을 하반신 인체 모형으로 표현한 이돈순 작가 작품.

이돈순 작가는 '분리된 도시의 삶-광주대단지사건으로부터'전에서 청바지를 입은 하반신 인체 모형 22개가 무릎 꿇거나 못 박힌 모습을 연출해 당시 시위 현장에서 구속된 시민 22명의 아픔을 되살려냈다.

극단 '성남93'은 '아홉 켤레'를 기반으로 만든 뮤지컬 '황무지'에서 노래와 연기로 광주대단지사건 현장을 재현한다.

윤 작가는 이에 대해 "정부가 국민을 오도하는 건 49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시민들에게서 희망을 본다"며 "문제의식이 있는 시민들 덕분에 과거의 병폐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작가는 요즘 신간 '문신' 마지막 권 집필에 여념이 없다. 젊은 남성이 징집돼 전쟁터에 나갈 때 몸에 문신을 새겨 시신이라도 고향에 묻히길 바라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윤 작가는 "앞으로도 역사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업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글/이여진기자 aftershock@kyeongin.com, 사진/성남시·성남문화재단·문학동네 제공·경인일보DB

■ 윤흥길 작가는?

▲ 1942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 1964년 춘포국민학교 교사, 숭신여자중·고등학교 교사

▲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회색 면류관의 계절'로 등단

▲ 1973년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1977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로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 1983년 '완장'으로 제28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83년 '꿈꾸는 자의 나성'으로 제1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 1995년 '낫'으로 제12회 요산문학상 수상

▲ 2000년 '산불'로 제6회 21세기문학상 수상

▲ 2004년 '소라단 가는 길'로 제12회 대산문학상 수상

▲ 2010년 '소라단 가는 길'로 제14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신' 등으로 제10회 박경리문학상 최종 후보 5인 선정(수상자는 다음 달 17일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