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 만나면서 '페르귄트' 등 빛봐
이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노르웨이 기상청으로, 국내 포털 검색 사이트의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노르웨이 기상청은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접속이 늘자 한국어 지원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기에, 노르웨이와 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서양음악사에서 노르웨이는 에드바르 하게루프 그리그(1843~1907)만으로 각별한 위치를 점한다. 노르웨이의 문학과 미술을 각각 대표하는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뭉크는 그리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세 예술가 중 작품에 조국을 보다 적극적으로 투영한 사람은 그리그였다. "사람은 자연의 느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구보다도 조국의 자연을 사랑했던 그리그는 자신의 지론을 작품에 반영했다.
그리그는 6세에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북유럽의 파가니니'로 불린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은 15세의 그리그를 보자마자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다. 불은 그리그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멘델스존 풍의 보수적인 독일 낭만주의 경향이 지배했다. 북유럽에서 온 음악학도는 라이프치히의 음악 분위기에 곧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선 4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1862년 고향인 베르겐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그리그는 독일 음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며, 노르웨이 스타일로 구성된 대작을 발표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기초 작업으로 민요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후 그리그의 열망은 입센을 만나면서 구체화 됐다. 입센은 그리그에게 자신의 극 '페르귄트'의 부수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874년부터 2년간 작곡된 극음악 '페르귄트, Op 23'은 유명한 '솔베이지의 노래'를 비롯해 24곡으로 구성됐다. 나중에 제 1·2 모음곡으로 편집되는데, 네 곡씩 담긴 두 모음곡은 오늘날 빈번히 연주된다.
'페르귄트 모음곡, Op 46과 Op 55' 외에 '피아노협주곡 a단조, Op 16', '첼로 소나타 a단조, Op 36', '바이올린 소나타 3번, Op 45' 등이 현재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05년 독립까지 무려 500여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노르웨이는 그리그를 배출함으로써 북유럽 어느 나라 보다도 뚜렷한 민족음악을 갖게 됐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