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을 썼다면 롤모델 삼았을것

케루비니는 26세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0년 넘게 파리음악원 교수와 원장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0년 후배 베토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케루비니의 오페라 '로도이스카'(1791년 초연)는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구출하는 줄거리를 갖는 '구출 오페라'의 효시 격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쫓기는 자의 심정에 강한 동정을 표했고, 불의에 쫓기는 정의로운 사람의 탈출을 돕는 영웅의 등장을 갈망했다.
이 같은 시대상이 구출 오페라를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었다. 1800년에 초연돼 극찬을 받은 '2일간'은 케루비니의 구출 오페라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이자 역시 구출 오페라인 '피델리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1805년 베토벤의 오페라 '레오노라'가 초연됐다. 케루비니도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을 보고 난 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케루비니의 위상을 높이 산 베토벤은 케루비니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후일 이 곡을 개작해 '피델리오'로 재연했다. '피델리오'는 현재까지 상연되는 걸작 오페라 중 하나다.
케루비니의 종교음악을 대표하는 '레퀴엠 c단조'는 1816년 1월 루이 16세의 추모 미사 때 초연됐다. 케루비니가 루이 18세 아래서 왕의 음악 담당자이자, 궁정 교회의 음악 총책임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그로 인해 케루비니는 교회음악의 작곡에 노력을 쏟았는데, 그 산물 중 하나가 c단조 레퀴엠이다.
베토벤은 레퀴엠을 작곡하지 않았지만, 만약 자신이 레퀴엠을 쓴다면 케루비니가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선 케루비니의 레퀴엠이 연주됐으며, 슈만과 브람스 등 후대 작곡가들도 이 곡을 예찬했다.
20세기 들어서 케루비니에 대한 평가는 다소 박해진 가운데, 1948년 영국 런던에 '케루비니협회'가 설립된 이후 서서히 재평가받고 있다.
/김영준 인천본사 문화체육부장